영국 의사 제너(1749~1823)가 개발한 우두술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인류를 괴롭혀온 수많은 질병 가운데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퇴치한 것은 아직까지도 두창(일본식 병명은 천연두)이 유일하다. 그 두창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수단이 바로 우두술이다. 두창은 1976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가 발생한 것을 끝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두창이 종식된 것을 확인한 세계보건기구는 1978년부터 우두접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선포했다. 따라서 1978년생부터는 우두 자국이 없다.
인류 최초의 효과적인 질병 치료법, 제너의 우두술
제너의 우두술은 근 2세기에 걸친 두창 퇴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최초로 질병에 대해 진정 효과적으로 대처한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우두술은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를 비롯해 서양 이외의 나라에서 근대서양의술의 효능을 뚜렷하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동아시아 세 나라 모두 우두의사를 양성한 것이 근대적 의학교육의 출발이 되기도 했다.
정약용(1762~1836)이 저술한 의학서적 <마과회통(麻科會通)>. 초간본은 1798년에 나왔으며, 1828년 판본 부록에 제너의 우두술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이 실려 있다. 정약용이 실제로 우두접종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은 1790년대에 중국으로부터 인두술을 도입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히 치사율이 매우 높은 두창이 크게 유행했다. 당시 인두술로 두창을 예방하는 노력을 했지만 사람의 두창을 사용하는 인두술은 소의 두창(우두)을 이용하는 우두술에 비해 부작용이 많았고 효과도 떨어졌다.
최초로 일본과 근대식 조약을 맺은 직후인 1876년 5월 의원이자 역관인 박영선은 수신사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일본에서는 이미 인두술 대신 서양에서 전래한 우두술로 두창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있다는 사정을 알게 된 박영선은 약식으로 우두술을 배우고 또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가 저술한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구해서 귀국했다.
<종두귀감(種痘龜鑑)> 표지. 본문 22쪽의 소책자로, 대학 동교(도쿄 대학의 전신)의 중조교(中助敎)이자 종두관(種痘館) 간사인 구가 가쓰아키가 1871년에 펴낸 것이다.
박영선은 자신의 방일 체험을 지인들에게 술회하는 자리에서 우두술에 관한 이야기도 했는데, 제자인 지석영(1855~1935)이 특히 관심을 보였다. 우두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지석영은 1879년 가을, 일본 해군이 1877년에 부산에 세운 최초의 근대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에서 두 달 동안 우두술을 익히고 두묘(우두 원료)와 종두침을 얻었다. 지석영은 귀경길에 자신의 본향이자 처가가 있는 충주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두 살 난 처남에게 우두접종을 했다. 우두에 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처가 식구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지석영은 마침내 어린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술한 지 나흘 만에 우두접종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지석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평생을 통해 과거에 급제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 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남의 팔뚝에 우두 자국이 완연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석영의 우두사업에 역풍을 몰고 온 임오군란
자신을 얻은 지석영은 그곳에서 40여 명에게 더 시술을 하여 우두술의 효과를 거듭 확인한 뒤 한성으로 돌아와 1880년 3월부터 공개적으로 우두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0년 6월 지석영은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되어 제생의원에서 미처 배우지 못했던 종묘(種苗) 제조법을 비롯해 우두술과 관련한 모든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일본 방문에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한 지석영은 1880년 10월 한성에 종두장을 차리고 본격적인 우두접종 사업을 비교적 순조롭게 펼쳐나갔다.
무당의 배송(拜送) 굿. 두창에 걸린 뒤 대개 열사흘 째 되는 날, 무당을 불러 두창 귀신(痘神)이 말썽부리지 않고 곱게 물러가도록 배송하는 굿을 벌였다. 우두술 보급은 무당들의 존재와 수입을 크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석영의 우두사업에 역풍이 불어 닥쳤다. 1882년 7월의 임오군란이 그것이다. 신식 군대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던 구식 군대의 항거로 시작된 민군 합동의 봉기는 이른바 모든 ‘개화문물’에 미치게 되었다. 이 저항세력에는 우두술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무당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석영의 종두장을 개화운동의 텃밭이라며 불태워 버렸고 지석영을 개화운동자로 몰아붙여 처단을 요구했다. 이에 놀란 지석영이 충주의 처가로 피신하게 됨으로써 우두사업의 제1막이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국가보다 민간이 먼저 독자적으로 시술한 우두접종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한성으로 돌아온 지석영은 파괴된 종두장을 복구하고 다시 우두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정부에서도 우두술 보급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정책 시행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1870년대 후반 우두술을 습득하고 시술한 사람으로는 지석영 외에도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우두 시술을 했는지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지석영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독자적으로 우두술을 보급했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가가 아직 우두사업을 계획하기 전에, 지석영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얼마 전까지도 외래 문물이라 금기시되었던 우두접종을 시술하고 있었다. 근대는 위에서 주어지기 전에 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1880년대 후반 충청우도에서 펴낸 <우두절목(牛痘節目)>. 태어난 지 70일이 지난 영아(�兒)는 누구나 우두 접종을 받아야 했다. 서양에서도 대체로 강제 접종을 했지만, 조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러한 방침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양이 1881년 일본을 시찰한 뒤 우두에 관해 보고한 사항은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그 핵심은 강제 접종과 우두의사 면허제도였다.
정부가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한 1885년에 접어들면 우두접종은 국책사업이 된다. 아마 1883년에 설치한 충청도 우두국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과 마찬가지로 우두 보급사업도 당시 외래 문물의 도입과 시행을 담당했던 외아문(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소관이었다. 실제로 우두접종을 시술할 우두의사의 교육은 각 도의 감영이 주관했으며, 소정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졸업장과 면허장 격인 ‘본관차첩(本官差帖)’을 주었다. 이렇게 우두의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독점적인 시술권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정부는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우두접종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외아문이 주관하여 1885년 11월에 시작된 국가 우두 사업은 불과 1년 만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 뒤 지방에 따라 우두 보급이 중단되거나 유명무실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정부에 의한 우두 사업은 지속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두창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보건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19세기 말까지 세계적으로도, 확실하고 직접적인 수단으로 대항할 수 있는 전염병이 우두를 통해 예방하는 두창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근대 의술과 교육
1885년부터 가장 중요한 국가 보건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우두 보급은 당시에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았을까? 기존의 인두술은 금지하고 외래의 우두술만을 인정하는 강제적 우두접종, 이러한 자못 급진적인 국가 정책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민심은 우두 사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기존의 인두의사와 무당처럼 우두 사업의 시행으로 직접적인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말할 것 없고, 외국과 외래 문물에 대해 막연하든 구체적이든 두려움과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중들이 강제적인 우두접종에 저항했던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85년 겨울 우두교수관으로 충청도 정산읍을 방문했을 때, 우두술이 어린 아이를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자녀와 함께 산으로 피신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지석영의 술회처럼 잘못된 정보와 인식으로 우두를 기피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접종비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아예 우두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중들이 우두접종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우두술, 나아가 근대의술은 점차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된다. 우두접종을 국가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석영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의 교장이 되어 1902년에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의사들을 배출하는 위업을 달성하는 등 한국 근대의학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동아일보> 1948년 12월 4일자. 11월 한 달 동안 서울에서 146명의 두창 환자가 발생하여 그 가운데 40퍼센트가 사망했다는 기사이다. 두창은 1950년대까지도 맹위를 떨쳤다. 특히 한국전쟁 때인 1951년에는 4만3천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1만1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하지만 1960년에 마지막 환자가 생긴 뒤로 두창은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퇴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