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는 남산.
그 중에서도 일명 ‘삼순이 계단’은 드리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과 김선아가
사랑의 실랑이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세를 탄 뒤 많은 연인들의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삼순이 계단이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 전문가 최태성 작가에게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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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계단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자신들의 신을 모신 신사를 참배하러 가기 위해 만든 참배길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가 된 남산이지만 남산자락에는 우리의 역사가 곳곳에 깃들어있다. 또한, 남산의 한자표기는 ‘남산(南山)’ 즉,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인데, 그 기준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바로 왕이 있는 경복궁이 그 기준이었다. 왕이 바라봤을 때 남쪽에 있는 산, 왕이 기거하는 경복궁의 앞산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조선왕조는 남산 정상에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국사당을 지었는데, 현재 팔각정 자리가 바로 국사당이 있던 자리다. 그런데 왜 지금은 국사당 대신 팔각정이 있는 걸까? 국사당은 사라진 걸까? 과거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신사 참배 정책을 수립하여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일본의 신을 모신 신사를 설립하고 조선인에게 참배토록 했다. 경성부의 경우 지금의 남산공원에 신사를 세우기로 결정했는데, 일본은 이 신사에 일본을 건국했다는 전설의 주신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와 1912년에 사망한 일본 메이지 유신의 주인공 메이지 덴노를 주신으로 삼았다.
일본은 조직적으로 남산을 일본식민지 지배에 활용한다. 을사늑약으로 설치된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은 바로 안중근 의사의 손에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가 머물렀던 통감부 청사와 관저가 모두 남산자락에 있었다. 왜 이토는 이곳 남산에 통감부를 지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머물렀던 왜성대가 남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남산은 역사 속에서 두 번이나 일본에 의해 많은 수난을 당한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남산은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그 어디에도 조선시대 왕가의 남쪽을 지켰다는 정체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와 같은 지적이 계속되자 1991년부터 서울시에서는 남산 제 모습 갖추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95년 국가안전기획부 이전, 96년 국가안전기획부 별관 건물 철거, 그리고 수도방위사령부 이전까지 쉼 없이 달려오면서 남산은 오늘날까지도 원래 모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