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의 우연

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마감한 인생

한 모금의 우연 : 나폴레옹과 커피(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마감한 인생) 한 모금의 우연 : 나폴레옹과 커피(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마감한 인생)
한 모금의 우연 한 모금의 우연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나폴레옹

한 모금의 우연 :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나폴레옹
피어 오르는 향긋함과는 사뭇 다른, 거칠고 굽이치는 역사를 거쳐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가 된 커피.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커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을까. 나는 주저 없이 나폴레옹이라고 말하고 싶다. 워낙 소설 같은 일화가 많은 위인이라 커피와 관련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전해지지만 젊은 나폴레옹이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장의 군인들에게 보급품으로 지급할 정도로 커피의 효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포화가 사라진 막간의 참호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을까. 위로와 함께 따뜻한 휴식을,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픈 희망을 키워 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폴레옹은 군사들의 각성과 운동능력의 향상을 위해서 였겠지만.) 솔직히 나폴레옹과 술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기는 하다(웃음).

대륙 봉쇄령에 따른 설탕과
커피의 부족이 가져온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이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이미 커피 없이는 살기 힘들어진(?) 카페 전성기인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카페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절대왕정이 막을 내리게 된 사회적 격동기였다. 최초의 문학카페로 알려진 프로코프(café procope)의 단골 이름 중에는 나폴레옹도 있었지만, 그것이 커피를 좋아해서인지는 알 수 없고(카페에서는 술도 팔았다고 하니까), 당시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영민한 나폴레옹도 자주 드나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한 모금의 우연 : 대륙 봉쇄령에 따른 설탕과 커피의 부족이 가져온 나폴레옹의 몰락
한 모금의 우연 : 대륙 봉쇄령에 따른 설탕과 커피의 부족이 가져온 나폴레옹의 몰락
어쨌든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주변국가들은 자국에 혁명사상이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프랑스를 공격하여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때 활약한 20대의 젊은 사령관 나폴레옹.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으로 진군해야 하는 굽이 치는 원정을 잘 이끌려면 얼마나 많은 전술과 정보가 필요했을까. 커피를 활용한 것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본인과 군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알코올. 무거운 와인 통을 다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와인 같은 효과를 내되 양을 적게 농축한’ 브랜디(꼬냑)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가 즐겼다는 ‘황제커피’라는 것도 결국 커피에 꼬냑과 설탕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결국, 술을 더 좋아했다니까. ^^)

실권을 잡게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포함한 대륙부를 그 세력하에 두게 되었는데(1799), 이에 대적하던 영국의 대항책으로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게 된다(1806). 당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영국을 봉쇄하여 수출입을 완전히 차단시키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는 유럽 대륙의 커피와 설탕 부족을 초래하게 된다. 설탕은 금세 대체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어 실용화되었는데, 각성작용까지 얻을 수 있는 커피의 대용품은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물론 카페인 성분에 대해서 밝혀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지만, 대용품을 마심으로써 채울 수 없는 ‘어떤 부족함’은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대륙 봉쇄령은 영국에 큰 손해를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영국의 공산품을 요구하던 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만 쌓여, 이윽고 실각을 초래하게 되었다. 철학자 칼 마르크스도 후에 ‘대륙봉쇄에 의한 설탕과 커피 부족이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 타도에 불타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전쟁의 거대한 지각변동 속에서
탄생한 커피대국 브라질

같은 시기,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따르지 않았던 포르투갈 왕족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잠정적인 포르투갈의 수도가 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산업과 인프라가 발전하게 되며, 커피 재배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브라질 커피 생산의 특징인 대농원 방식으로 생산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커피대국 브라질이 탄생한 것이다. 이미 16세기경부터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를 노동력으로 설탕 플랜테이션을 운영하여 거액의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대륙 봉쇄령으로 설탕 대용품이 개발되면서 설탕수수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고, 설탕 플랜테이션은 필연적으로 커피 생산에 유용하게 된다.

더불어 그때까지 모카의 커피들을 유럽대륙으로 무역하며 호황을 누리던 네덜란드는 프랑스혁명군에 점령당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로 합병되면서 동인도회사도 해산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수입판매하던 비싼 모카 커피에 비하면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커피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축복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 시장 가격은 폭락하였고, 커피 시장은 지각변동을 일으켰겠지만, 소비자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였지 않았을까. 이후 지금까지 세계 커피 시장에 있어서 브라질의 역할은 가히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스푼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 맛

한 모금의 우연 : 생의 마지막 순간, 스푼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 맛
그렇게 종횡무진 하던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 전쟁에 패배한 후, 세인트 헬레나 라는 예쁜 이름의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은 화산섬으로 커피 재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지금도 6개의 작은 농원이 있다). 포화와 치열함 속에서 살아가야 할 때에는, 커피보다는 알코올의 힘이 더 필요했을 테지만,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약해지는 몸을 가누기에는 커피의 향기만한 것이 또 있었을까.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유배지에서의 6년간, 나폴레옹은 매 식사 후 빼놓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곳의 커피가 정말로 맛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2011년부터 7년간 매년 구매하여 마시고 있는 필자의 경험상)

그가 죽음에 이르기 며칠 전까지도 커피를 찾으니, 그의 주치의가 하는 수 없이 커피를 허락하여 스푼으로 떠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커피가 있던 공간 ‘카페’를 기점으로 시작되어, 전쟁에서는 커피의 효능을 누구보다 잘 활용한 사람. 사람들에게서 커피를 빼앗음으로써 공분과 타도의 의지를 사고, 결국에는 커피가 있는 섬에 유배되는 일생을 보낸 사람. ‘커피로 시작하여 커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그의 인생에, 커피는 훌륭한 도구였고 수단이었으며,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최고의 위안이자 위로였을 것이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마셨을 스푼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 맛은 어떠했을까.
한 모금의 우연 : 생의 마지막 순간, 스푼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 맛
한 모금의 우연 : 생의 마지막 순간, 스푼에 담긴 한 모금의 커피 맛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 대표이며, 《커피교과서》 《스페셜티커피테이스팅》 《커피과학》 《카페를 100년간이어가기위해》 등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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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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