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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고집을 부리는 자기만의 분야가 있을 텐데, 나에게는 구두가 그런 것에 속했다.
나는 구두 한 켤레를 사면 새로 사기 전까지 꾸준히 그것만 신었다. 그걸 못마땅해 하는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내의 듣기 싫은 잔소리에도 내가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20여 년 전 내가 졸업과 동시에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며 어머니에게 처음 받은 구두 한 켤레로부터 시작됐다.
“사람 게을러지면 못쓴다. 고생스러운 일도 마다하지 말고, 불러주는 대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힘차게 뛰어다녀봐.”
백화점 한번 들어가 본 적 없는 어머니가 당시 우리 살림에 비하면 상당히 고가였던 그 구두를 무슨 용기로 사오셨는지. 그때부터 나는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자식이라는 이름을 위해 달렸고, 큰 고비 없이 일이 잘 풀릴 때마다 어머니께서 사 주신 그 구두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한 켤레, 자식을 낳고 또 한 켤레, 새로운 팀으로 옮기고 또 한 켤레, 이렇게 구두를 장만해 왔다. 그리고 부족함 없이 든든한 남편, 늘 자랑스러운 아빠, 일 잘하는 조직 구성원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 발 끝에 힘을 실어 구두에 올라탔다.
어떻게 보면 구두가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이었다.
이 구두도 바꿀 때가 되긴 했지, 재작년 프로젝트 시작하면서 산 건가? 나는 머뭇거려지던 그 일을 해보기로, 다시 새로운 구두를 신고 또 한걸음 나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신발장 문을 열어 묵은 신발들을 꺼냈다.
아내가 옆에서 떡 하니 지켜 서서 보는 통에 나는 꼼짝없이 내 구두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모아 버리려고 보니, 나를 지금 여기에 실어다 준 인생의 배들을 떠나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 이 저릿해졌다.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마경덕의 시 <신발論>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