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클림트와 에곤 실레(4) - 또 한 명의 천재


실레의 작품을 처음 접한 한 컬렉터는 ‘어설픈 클림트 따라쟁이’라고 비하합니다.
이후 그는 실레에게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진 스케치도 버리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로 생각이 바뀌게 되죠.

독특한 색감과 터치, 에로틱하고 과감한 인체 묘사,
성적인 주제의 자극적 표현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에곤 실레.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에곤 실레의 예술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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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를 놀라게 한 에곤 실레의 재능

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톨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철도청 소속 역장이었기 때문에 실레 가족은 톨른 역사 내에 있는 주택에서 살았다고 하네요. 자연스레 실레는 기차역 주변과 기차들을 그리는 일상을 보내게 되죠.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빈 국립미술아카테미에 입학합니다. 이렇게 예술가를 꿈꾸던 실레는 17살 때 클림트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당시 실레는 학생이었고 클림트는 이미 오스트리아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 화가였죠. 그러나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오히려 이 어린 친구의 재능에 압도됩니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는 대답합니다. “재능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이후 클림트는 선배이자 멘토로서 에곤 실레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줍니다.

짧았던 삶이 남긴 강렬한 예술

실레는 자아도취적인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추한 누드의 자화상을 통해 인간이 가진 불안과 우울을 정직하게 표현했는데, 추함의 모습도 우리 인간이 가진 모습 중 하나라며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그려낸 것이죠. 그래서 너무 적나라한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기 보다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다소 불편하기도 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매춘이 성행해 엄청나게 많은 매독 환자를 만들었고, 그의 아버지도 매독으로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이를 본 실레는 트라우마와 함께 성과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눈 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버지를 보며 인간의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만 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로티시즘의 대가로 알려진 에곤 실레는 실생활도 성적으로 문란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 그의 측근들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릴 뿐이다. 에로틱한 예술 작품에도 성스러움은 깃들어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불안한 시대정신과 육체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실레는 드로잉, 수채화 등 도화지 작품 2천여 점, 유화 3백여 점 많은 양의 시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 독감은 에곤 실레와 그의 아내 에디트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실레가 세상을 떠난 시점은 아내의 죽음 3일 후였죠.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또 한 명의 천재 예술가의 삶은 불과 28년, 너무 짧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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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2-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