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떠올린다. 원작이 있는 영화, 그 원작을 먼저 읽어버린 영화라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일종의 ‘원작 기억하기’이다. 원작이 인상에 남을수록,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의 의식은 둘 사이를 분주히 왔다 갔다 한다. 김영하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원신연 감독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볼 때도 그랬다.
“소설에서 김태수의 나이는 몇이었지 ” “금강경 얘기는 빼 먹었네. 그게 작품 전체의 키워드인데”하면서 영화에 몰입하지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 슬금슬금 빠져 나와 물러선다. 차라리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내용을 잊어버렸다면 영화가 훨씬 더 흥미롭고, 추리하는 재미도 있었을 텐데.
불가능이다. 인간이 기억을 가진 이상은
자꾸 원작을 떠올리려 애쓴다. 마치 그 ‘기억’이
영화를 보는 목적이 되어버린 듯하다.
기억이란 이처럼 때론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벽’이 되거나, 다른 것의 변형을 강요하는 강박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을 빼먹든 말든, 스토리를 바꾸든 말든, 인물이 다르든 말든, 결말이 이상하든 말든 소설의 ‘기억’을 버리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봐야 편안하다.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원작에 대한 기억들.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지우려 한다고 지워지는 것도, 떠올리려 한다고 언제든 아무런 막힘 없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그 ‘기억’이야말로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기억도 영화처럼 얼마든지 조작하고, 가공하고, 거짓을 집어넣을 수 있다.
인간에게 기억은 삶 자체이다. 기억이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기억하고, 기억됨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존재한다. 기억이 없으면 세상도 없고, 시간도 없다.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역사도 없다. 순간순간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 현재 역시 잠깐 존재하다 영원히 소멸해 버리고 만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김태수는 불교의 금강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공(空)’이라고 했다. 꼭 불가의 법이 아니더라도 기억이 없는 인간은 모든 것(色)이 무(無)인 ‘색즉시공’이다.
죽음이 두려워 인간이 믿고 싶어 하는 영생(永生)도 어쩌면 ‘기억’일지 모른다. 인간을 ‘기억’ 속에서 살아있게 하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고, 누군가는 또 나를 기억함으로써 살아있다. 그 기억이 없어지면, 누군가와 나도 영원히 사라진다. 예수 역시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억되기를 원했기에 자신의 몸과 피를 영성체로 나누어주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했다. 인간이 역사에 기록돼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원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의 이성적 자기고백과 달리 감정과 스릴이 넘치는 휴먼드라마이다. 감정은 잔인하기 그지없던 연쇄살인마 김병수(설경구)의 과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인 아내가 낳은,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말만 딸인 은희(설현)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여느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던지는 그의 사랑과 희생에서 나온다. 그 모습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은 딸의 목숨을 노리는 민태주(김만길)란 인간 역시 냉혹한 연쇄살인마이고, 김병수가 석 달 전 치매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아 이따금, 갈수록 자주 기억이 끊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 설정은 소설과 같다. 그러나 소설이 연쇄살인범이란 극단적 인물인 병수의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쓸쓸한 회한의 서술이라면, 영화는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잃어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그의 애절하고 집념 어린 기억하기이다. 물론 그 애절함과 집념 속에는 딸 은희가 있다.
사람을 무수히 살해한, 심지어 첫 살인으로 가정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죽인 이제는 늙어버린 잔인한 악마의 생명 지키기와 그것을 위한 자기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소설은 ‘잘못된 기억’으로 인한 착각으로 우리를 속이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은희는 딸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기억상실이야말로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그때부터 살의가 사라졌고, 치매에 걸려 기억조차 제대로 못하지만 병수에게는 또 다른 살인의 시작이다. 그의 말처럼 ‘손이 기억하고 습관은 오래 가서’ 25년 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를지 모른다.
영화는 반대다. 기억 잃음은 나도 모르는 살인의 시작이 아니라 살인을 막고, 딸의 목숨을 구하는 장애물이다. 그래서 병수는 녹음과 메모의 ‘기억을 기억하는 법’을 통해 과거 잔인하고 거침없던 범죄를 끝없이 들춰내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기억하려 애쓴다. 그런 김병수의 기억하기는 참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상에는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들이 있다고 했다. 술만 취하면 어머니와 누이, 자신에게 죽음보다 끔찍한 폭력을 밥 먹듯 행사하는 짐승의 눈빛을 가진 아버지. 그 아버지와 비슷한 가정 폭력범. 자신의 반지를 삼켰다고 살아있는 개를 때려죽이고는 배를 갈라버리는 잔혹한 여자. 돈을 갚지 않으면 장기적출과 인신매매까지 저지르는 악덕 사채업자와 가족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 병수는 이들을 ‘존재 이유 없는 쓰레기들’이라고 했다.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 그는 사소한 다툼, 심지어 기분이 나빠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법을 대신해 응징을 한 것이라고 소리친다. 아무리 기억상실에 걸렸더라도 그래야 지금의 그의 존재와 행동이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인간은 때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기억에 자신의 욕망을 덧칠을 하기에 ‘기억’이 모두 ‘사실’은 아니다. 영화는 이를 무시했다. 더구나 살인자에게서.
김병수의 기억이 사실이더라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이 소설에서의 정신병적 행위이든, 영화에서의 악에 대한 응징이든. 물론 병수는 소설과 영화에서 죄의식을 드러낸다. 오래 전에 자살한 누이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그는 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게 “나 벌 받는 건가”하고 물어 본다. 그에게 벌이란 다름 아닌 기억상실, 기억혼돈이다. 그러나 기억이 인간 존재 자체이고, 그것을 잃는 것이 자기 소멸이라고 해서 죄도 따라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악의 존재를 막았다고, 자신에게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고 죄가 상쇄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반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소설의 살인마의 기억과 시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슴 졸이는 사건 전개에 매달렸다. 김병수의 기억상실로 위기감을 높여 관객들이 잠시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김병수와 민태주의 대결 구도, 병수의 딸에 대한 사랑, 그것을 알고 있기에 “언제나 나는 아빠 편”이라고 말하는 은희가 영화에서 가야할 곳은 뻔하다. 민태주에게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기억’을 붙잡으려 발버둥치는 아버지를 누가 욕하고 가로 막을 수 있겠는가. “너는 내 딸이 아니니까.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살인자였다고 해서 누가 함부로 비웃겠는가.
이렇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면서 마지막 기억을 붙잡고 딸을 구한 김병수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했다. 물론 세상은 그에게 죄를 묻고 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도 끝났고, 더구나 그는 치매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의 기억이 첫 살인(아버지)을 저지르기 전인 열다섯 살로 돌아간 것도, 그가 은희를 누나로 착각하는 것도, 은희가 그에게 그렇게 소망하던 하얀 운동화를 신겨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설경구가 역시 주연을 맡은 18년 전의 영화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처음 ‘순수’의 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영호가 철로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보고 “나, 돌아갈래”라고 외쳤지만, 돌아갈 수 없었듯이 병수 역시 아무리 기억을 지우고, 열다섯으로 돌아가도 이미 지나온 시간은 그의 것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마지막에 가서 새삼 “너의 기억을 믿지 마라, 태주는 살아있다”는 말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진짜인지, 기억의 조작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속편을 만들 욕심인지 모르겠으나 픽션인 영화라고 제멋대로 다시 되돌려서는 안 된다. 김병수는 문화센터에서 만난 여자 조연주에게 “영화는 안 본다”고 했다. 가짜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기억하면 할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