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용한 열정>(감독 테렌스 데이비스)에서 새벽녘까지 혼자 시를 쓰고 있는 에밀리 디킨슨에게 오빠의 아내 수잔이 찾아와 말한다.
“너에겐 시가 있잖아.”
그래, 그녀에게는 삶이고, 역사이고,
신앙이고, 위안이자 기쁨인 시가 있었다.
짧지만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소박하고,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독백을 그녀는 1천775번이나 했지만, 그것을 ‘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것은 한 번도 답장하지 않는 / 세상에 보내는 나의 편지 / 자연의 부드러운 당당함으로 / 전해주는 소박한 소식’일 뿐이었다. 자신 역시 ‘시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꼭 시인이어야 시가 되고, 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과 자신의 시를 알지 못하고 지나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난 아무도 아녜요 / 당신은 누구인가요 / 당신도 아무도 아닌가요 / 그럼 우린 같은 처지인가요 / 입 다물고 있어요, 사람들이 소문낼지 모르니까 - 아시다시피 / 정말 끔찍해요 / 유명인이 된다는 건 정말 요란해요 / 개구리처럼 긴긴 6월에 존경심 가득한 늪을 향해 개골개골 제 이름 외쳐대는’ 것이 싫어서. 혹시라도 세상이 기억한다면 그저 ‘나도 후하게 판단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1830년 12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5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밀리 디킨슨을 따라다닌 것은 이별과 고독, 질병의 고통과 시련이었다. 사랑을 눈 뜰 즈음 찾아온 시력상실, 종교 문제, 정치인인 아버지와의 가치관 차이, 딸로서 아픈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의무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과 죽음, 병마(신장염)는 그녀를 자아 탐색의 은둔자로 만들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을 그녀는 자신의 언어들로 진솔하게 기록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지만 ‘우리는 자기 그릇만큼 밖에 담지 못하는’ 것을 애달파했다. 길 위에 뒹구는 작은 돌에서 ‘세상 출세랑 아랑곳없고 / 급한 일 일어날까 두려움 없이 혼자 살며 / 홀로 빛나는 태양처럼 다른 데 의지함 없이 / 꾸미지 않고 소박하게 살며 하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행복을 발견하기도 했다.
육체와 정신의 고통, 고독과 ‘죽음을 위해 멈출 수 없는’ 시간 위에서 그녀의 시들은 절망과 울분이 아닌 정화(淨化)와 위안이었다. 그것으로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 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면 / 지친 새 한 마리 둥지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라’고 믿었다.
영화는 그 믿음이 ‘조용한 열정’으로 이어졌음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그 어떤 형식이나 관습, 대상과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거침없는 그녀의 독백은 타고난 감성과 언어표현과 감각과 만나면서 간결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낳았고,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듯 추상적 사고와 구체적 사물을 섬세하게 결합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소망대로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시’가 됐다. 영화는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시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외로움과 고통,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에 대한 관조와 체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저항과 희망,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잔한 슬픔과 실존적 깨달음이다. 은유와 상징들로 가득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나 긴 고백보다 때론 시가 더 생생하고 구체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시를 담은 영화도 그럴 수밖에 없다.
비록 영화에서지만 시가 삶인 사람이 또 있다.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에 사는 버스기사인 패터슨이다. 그의 일과는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 23번 버스를 몰고 시내를 몇 번이고 돈다. 퇴근해서는 저녁을 먹고 강아지와 산책을 가고, 도중에 동네 단골 술집에 들러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맥주 한잔 마시고 돌아와서는 잔다. 그런 그에게 아내는 늘 묻는다. “오늘 어땠어?”라고. 그의 대답 역시 늘 같다. “똑같았어.”
그 매일 ‘똑같은’ 시간의 반복 속에 그의 시가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 그것들의 느낌, 그것들로 인해 깨닫게 되는 새로운 세상들을 틈나는 대로 작은 ‘비밀 노트’에 쓴다. 어떤 날은 한 줄, 어떤 날은 두세 줄. 작은 성냥갑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성냥개비를 가지고도 아내 로라에 대한 사랑의 시를 완성해 나간다. ‘나는 성냥 / 당신은 담배’가 되고, 성냥의 불꽃은 ‘키스로 불타오르는 천국’이 된다.
패터슨 역시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길에서, 공원에서, 버스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주변의 풍경들을 자신의 언어로 담을 뿐이다. 그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에게 시란 특별한 작업이 아닌 자기만의 상념이고 고백이고 관찰이다. 그렇다고 그는 시인이 아닌가.
짐 자무시 감독은 20년 전 그곳 출신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시들에 매료돼 영화 <패터슨>을 만들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도, 그의 시들을 영화에 담지도 않았다. 의사 출신인 그의 삶과 시보다는 영화 속의 지극히 평범한 주인공인 버스기사 패터슨으로 하여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일상의 풍경들에 대한 느낌을 쓰게 한다. 윌리엄스 역시 그렇게 시를 썼고 짐 자무시 감독 역시 <패터슨>으로 그런 시를 쓰고 싶었으니까.
'절망으로 가득하고 / 이룬 것 없는 내리막에서 / 새로운 깨달음이 온다’는 윌리엄스의 시 「내리막」보다는, 영화를 위해 쓴 것이지만 ‘나는 지나간다 / 수많은 분자가 옆으로 비켜 나 길을 터주면 / 길옆으로 더 많은 분자가 그 자리에 머문다 / 비가 멈췄다 / 나도 멈춰 섰다’고 버스를 몰면서 쓴 패터슨의 「더 런」이 오히려 깊고 새롭다. 윌리엄스가 시 「봄과 모든 것」에서 말한 ‘모든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그 ‘모든 것’에는 ‘시’도, ‘영화’도 들어있다. 하나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지만 패터슨이 하루하루를 늘 새로운 느낌으로 맞이하고, 강아지가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아 하루아침에 쓴 시가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삶이 그렇듯, 시도 그런 것이다. 유명해지거나 널리 읽히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삶도, 시도 각자의 것이니까. 그래서 소설가 김훈은 “시를 읽을 때 내 마음은 시행을 이루는 언어와 그 언어 너머의 시적 실체 사이에서 표류한다”라고 했다. 누구도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녀의 삶에 비추어 짐작할 뿐이다. 그녀의 ‘고독은 (누구도) 잴 수 없는’ 것이며, ‘그 크기는 무덤에 들어가서 재는 대로 추측할 뿐’이다. 아니면 그것을 나의 영혼과 가슴으로 껴안아 ‘나의 시’를 만들 뿐이다.
시를 이야기하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의 실체를 온전히 보여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저 제 나름대로 만나고 읽으면 된다. 그래서 <조용한 열정>은 시의 해설자가 아닌 스스로 한 권의 시집이기를 원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따라가면서도 극적 흥미를 위한 ‘스토리텔링’이나 ‘대사’를 애써 만들려 하지 않았다. 소녀 시절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나날들을 연기와 대사가 아닌, 그녀의 시어와 어떤 묘사보다 명징한 이미지들로 이어갔다. 마치 영상 시집을 펼치는 것처럼.
영화라고 이야기를 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시가 그렇듯 영화 역시 때론 한 컷의 영상에 얼마든지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담을 수 있음을 <조용한 열정>은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영화까지 꼭 시일 이유는 없다. <패터슨>처럼 그저 삶의 풍경을 아무런 꾸밈없이 담담하게 관조해도 그 속에서 얼마든지 시를 발견할 수 있다. 지극히 소시민적인 패터슨의 같은 시간의 반복과 작은 변주의 일상이 시가 되듯이.
은유와 상징이 됐든, 일상이 됐든 ‘시가 된 영화’는 비워 둔다. 공원 벤치에 허탈하게 앉아있는 패터슨에게 여행 온 일본인 시인이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빈 노트를 선물로 건넨다. 그리고 동시에 “아하!” 그 비어있는 곳에 자유와 새로움이 있다. 삶도, 시도, 영화도 그런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