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북방의 겨울은 어떤가요? 살을 에는 추위라는 표현은 식상한가요. 몸 안의 피가 결빙될 것처럼 춥냐고 묻는다면 혹 웃으실까요. 외삼촌에게 들었어요, 아저씨가 해방 전에 만주로 건너갔고 그곳 조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가족과 함께 평안도 덕천에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요. 외삼촌도 지역만 겨우 알 뿐, 그 정확한 주소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하긴, 2년 전부터 그곳과 이곳 사이에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인위적인 국경이 생겼으니 이곳에서 아저씨의 주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기호일 뿐이긴 합니다. 황해도행 편지에 소인이 찍힐 리 없고 그곳까지 편지를 배달해줄 사람도 없으니까요.
지금 저는, 뚜껑을 닫아놓은 엄마의 풍금에 앉아 아마도 영원히 부치지 못할 이 편지를 씁니다. 실은 저도 꽤 오랜만에 이 방에 와본 것이랍니다. 저는 열아홉 살에 서울로 유학을 갔고, 서울에서 결혼과 전쟁을 치렀으니까요. 믿어지세요, 아저씨? 여섯 살의 옥희가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되었다는 것이 말이에요. 아저씨가 알던 시절의 우리 엄마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이죠. 스물세 살의 엄마와 달리 저에게는 아직 딸이 없다는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세 계절 만입니다. 세 계절 만에 저는, 고향에 내려와 엄마와 살던 집에서 혼자 겨울을 나고 있어요. 남편과 불화해서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한 사람을 떠나 보내는 과정 속에 제 삶의 일부를 온전히 헌납하기 위해 이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에도 한 줌의 후회도 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슬퍼하기 위해, 누군가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 겨울 동안 슬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현재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슬픔만 남아 있다고 대답하기 위해…….
아저씨, 엄마는 지난달에, 입동 지나 사흘째 되던 날, 이 집에서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혼자 힘으로 저를 키웠고 그 험한 전쟁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강인했지만 상처를 통해 핏속으로 들어온 병균은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모든 물자가 부족한 전후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엄마와 함께 병원들을 찾아 다닌 것,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진료실 밖 복도에서 우리의 접수번호가 불리기를 끝도 없이 기다린 것, 그리고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장의사를 불러 엄마의 고운 몸을 수습한 것, 수습한 엄마를 아버지 곁에 묻어준 것, 이뿐입니다. 엄마는 수술을 받지 못했고 저는 엄마에게 필요한 만큼 약을 구해다 주지도 못했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처가 생겼을 때 바로 처치했거나 실력 있는 의사에게서 좋은 약을 얻었다면 가볍게 멸균할 수도 있었을 병균 때문에 한 사람이 더 이상 제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비참하고 억울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모든 감정은 슬픔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더군요. 슬픔은 마치 단단한 다면체의 결정(結晶)처럼 제 몸 구석구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곤 했습니다.
창고에 방치된 이 풍금을 발견한 건 엊그제였어요. 엄마의 유품을 조금씩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죠, 이십 년 넘게 방치되었을 풍금은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고 모서리는 깨져 있었으며 의자는 삐걱거렸지만 태우거나 버릴 수는 없었어요. 풍금은 다른 어떤 유품보다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풍금의 완만한 곡선과 고독한 소리와 고요한 나무의 감각이 모두 엄마 같기만 했죠. 엄마가 타던 풍금 소리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풍금 뚜껑을 연 순간, 그리고 뜻밖에도 반듯하게 접힌 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건,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아저씨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오늘은 아저씨가 묵던 사랑을 청소했어요. 아세요, 아저씨? 여섯 살의 저에게 이 방은 자꾸만 손을 집어넣고 싶은 상자와도 같았다는 것을요. 이 방에선 제가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견되었고, 아저씨가 읽어주는 책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방에 배어 있던 아버지의 냄새가 저는 좋았습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것이 제가 이 방을 좋아했던 진짜 이유였어요. 저편에서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그 잘생긴 남자라면 촉감도, 온도도, 체취도 없는 사진으로만 대면한 것이 전부이니 그의 냄새를 기억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아저씨, 아저씨가 처음 사랑에 짐을 풀었던 그날,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와 사랑의 문을 연 순간 제 작은 폐 속으로 차곡차곡 밀려들어왔던 그 냄새는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만의 감각체계 안에서 형성되고 자라고 확고해진 그 냄새를 제가 모를 리가 없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햇빛 속에서 흩어지는 책 먼지의 흐릿한 냄새라고 하면 비슷할까요. 어쩌면 밤이 되기 직전에 대기를 감싸는 따스한 흙냄새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말로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냄새, 다만 편안하면서도 풍요로운 냄새라는 것만을 저는 확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저는, 아저씨에게서 아버지의 냄새를 맡은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엄마가 부재하는 이 집에서, 한 사람의 소멸을 애도하는 기간에, 이토록 뒤늦게, 저는 스물세 살 엄마의 마음에 가닿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청소를 마친 뒤, 저는 그 옛날 아저씨가 쓰던 베개를 베고 누워 잠시 눈을 붙였어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곧 길고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다가왔고 그 기차에서는 엄마와 아저씨가 내렸습니다. 여섯 살의 저는 두 분 사이에서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요. 세 사람은 이내 무심히 저를 지나쳐 플랫폼을 빠져나갔고 저는 굳어버린 듯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죠, 꿈에서 완전히 깰 때까지……. 아저씨에게 딸이 있다는 것, 저도 알고 있어요. 몸이 약한 딸을 위해 해방 직후 아내의 고향인 덕천으로 내려와 살았고, 때가 되면 서울로 오려고 시기를 타진하고 있다가 뜻밖에도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예 그곳에 발이 묶인 거라고요. 전쟁 중에 북에는 폭격이 많았다죠? 수도인 평양뿐 아니라 산간마을까지 구석구석 폭격을 당했다고, 오히려 폭탄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 드물다고 소문은 가르쳐주었죠. 그래서인지 외삼촌은 아저씨와 아저씨 가족의 생존에 조금은 회의적이었어요. 물론 이곳이라고 해서 목숨이 담보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요.
잠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저는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옛날 벽장 안에서 까무룩 잠들었다가 어두워져서야 벽장문을 연 순간, 저를 끌어안은 채 울고 웃던 엄마가 기억났습니다. 이제 사랑의 문을 열고 나가면 발을 동동거리며 애타게 저를 찾는 엄마가 아니라 어두운 공허만이 있겠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아는 거라곤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오직 그뿐이니까요.
아저씨,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엄마의 생일상을 차려준 적이 없더군요. 용돈을 모아 잡동사니에 가까운 선물을 사다가 안겨준 것이 고작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제 생활을 챙기기도 바빠 그마저도 소홀했죠. 엄마의 외출복을 꺼내 입고 엄마의 구두를 신은 뒤 엄마가 갖고 다니던 양산을 받친 채 장에 가서 음식 재료를 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선 쌀밥을 짓고 미역국과 반찬을 만들고 계란을 삶았죠. 상 위에는 네 사람 몫의 밥과 국, 수저를 놓았어요.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아저씨와 제가 둘러앉게 될 상이니까요. 우리는 한 마음으로 엄마의 생일을 축하한 뒤 웃으며 식사를 하면 되니까요.
이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입니다. 실은 장에 가기 전에 서울에서 전보가 왔어요. 남편이 내일 아침 저를 데리러 오겠다는 전보였습니다. 빈 집에서 벌써 석 달째 혼자 지내고 있는 제가 그는 퍽 난감한 모양이에요. 해가 바뀐 뒤에도 제 애도가 이어지자 그의 인내에도 한계가 온 것이겠지요. 하긴, 얼마 있으면 입춘입니다. 이 세상에는 또 다시 봄이 당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부지런히 흐르면서 이 지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지워가겠죠. 그것은 자연의 일이고 인간은 그저 왔다가 가는 지나가는 배역을 배당받은 존재란 걸 알면서도 아저씨, 저는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처럼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짓눌리는 듯했어요. 한 계절 내내 슬퍼했지만 슬픔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기에 죽음이 지나간 뒤의 슬픔은 매 순간 새롭게 차오르는 것임을, 저는 이 겨울 동안 배운 셈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창고로 가서 풍금 뚜껑 안에 엄마의 편지와 함께 제 편지도 넣어둘 거예요. 풍금은 우체통이 아니고 인위적인 국경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겠지만,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저 역시 자연의 일로 엄마 곁으로 가게 된다면 누군가 우리의 편지를 발견하여 읽어주길, 저는 이제 그 작은 소망을 소중히 보듬으며 살려 합니다. 그 소망이 엄마의 유산이니까요. 아저씨, 저도 엄마처럼 아저씨의 평안을 빌어요.
차형호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만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차형호 선생님이 건네준 손수건은 분명 매형의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확신하는 건 내가 선물한 손수건이기 때문이었다. 매형의 성은 박 씨였고 손수건에 영문자 ‘P’를 새겨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손수건이 왜 아저씨 것이란 말인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기, 선생님.”
나는 큰소리로 차형호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은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선생님. 이 손수건은.”
내가 말하자 선생님은 말했다.
“누님 드리면 알 거야.”
선생님은 내려가면서 풀을 다시 하나 꺾고는 접으면서 내려갔다.
나는 집으로 가서 손수건을 들고 한동안 망설였다. 누나에게 직접 줄 수 없었다. 나조차도 영문을 모르는데 일이 더 복잡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아저씨 빨래에 넣었다.
다음 날 빨래를 마친 누나는 옷들을 개키고 다림질을 하다가 매형의 손수건을 보았다. 누나도 너무 놀라는 눈치였다.
“얘, 옥희야.”
누나가 옥희를 불렀다.
“이 손수건 분명 아저씨 세탁물에서 가져온 거니?”
“응.”
옥희가 대답하자 누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한참 뒤에 방으로 가서 편지 한 장과 손수건을 가지고 나와 아저씨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옥희는 누나가 준 편지와 손수건을 가지고 아저씨 방으로 갔다. 전해주고 나오는 옥희를 이번엔 내가 몰래 불렀다.
“아저씨에게 손수건 줬어?”
“응. 그런데 아저씨가 손수건 안에 있던 편지를 읽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던데. 아저씨 아픈 거야?”
“글쎄. 모르겠어.”
그건 진심이었다. 무언가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눈에 보이는 구름처럼 분명 보이는데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하늘을 보았다. 구름에 가려 있던 달빛이 나타났다. 하품하다 눈을 뜬 고양이 눈동자처럼.
며칠 후 아저씨는 사랑방에서 나갔다. 언덕 위에서 우는 누나를 보았다. 삶은 달걀을 사주지 않았다고 옥희도 울었다. 나는 매형 무덤에 가서 풀피리를 만들었다. 만드는 건 제법이지만 아직 잘 불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잘 불겠지. 나는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 풀피리를 계속 불고 불었다. 늙은 고양이 소리 같았다.
〃 작가소개 〃
조해진
소설가, 1976년생
소설 『천사들의 도시』 『목요일에 만나요』 『빛의 호위』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여름을 지나가다』 등
『사랑손님과 어머니』
1935년 《조광(朝光)》지에 발표된 주요섭(1902~1972년)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에 하숙을 든 아저씨의 미묘한 연정을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한 서정성 짙은 작품입니다.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아저씨와 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아저씨가 사랑방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