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장 군산,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다.
군산 내항의 부잔교. 총 4개가 만들어졌는데 현재 3개가 남아있다.
전라도 지역은 평야가 넓고 날씨가 따뜻해서 쌀농사가 잘 되는 곳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가혹한 수탈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탈과 착취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는 아직도 군산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군산이라는 이름은 고려 때 지금의 고군산도에 설치된 군진인 군산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때 군산진이 지금의 군산시 해망동으로 옮겨오면서 군산이라는 이름도 함께 넘어왔다고 하네요.
금강 연안은 조운선이 머물던 곳으로 커다란 창고가 여러 개 있었지만 군산 일대는 조용한 어촌 마을로 언덕에 백여 가구의 집이 흩어져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군산의 운명이 변한 것은 1899년에 이뤄진 개항입니다. 서구와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해안 지역에 개항장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외국인들이 머무는 조계지가 설치됩니다. 군산은 1899년 개항장이 설치되는데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이긴 했지만 인근에 조운선에서 모아온 쌀들을 보관하는 군산창이 있을 만큼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군산의 개항을 가장 반긴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쌀을 본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기 때문이죠. 쌀을 가져가는 일본의 화물선들이 계속 드나들면서 군산항은 북적거리게 됩니다. 항구는 계속 커졌고, 군산의 인구도 계속 늘어났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바다의 특성 때문에 군산항에는 높이 조절되는 부잔교가 설치됩니다. 악착같이 쌀을 가져가겠다는 일본의 덧없는 야망의 흔적은 오늘까지 잘 남아있습니다. 군산 내항이 있는 내항사거리 일대는 군산세관과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근대 건축관과 미술관 등이 있어서 함께 둘러보고 좋습니다.
1908년에 세워진 군산 세관 건물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군산 동국사의 대웅전. 일본식 건물의 특징이 고스란히 보이는데 특히 가파른 지붕이 인상적이다.
군산의 금광동에는 1913년 일본인 승려가 금강사라는 사찰을 세웁니다. 광복 이후에도 이 사찰은 동국사로 이름을 바꾼 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대웅전과 요사채는 일본 사찰 양식 그대로 남아있는데 대웅전의 지붕이 굉장히 가파르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바로 옆에 전통 한옥도 세워져 있어서 쉽게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긴 하지만 사찰 특유의 고즈넉함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한 바퀴 둘러보는 동안 차분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동국사에는 진짜 멋진 공간은 바로 뒤뜰인데요. 대나무를 빽빽하게 심은 언덕을 뒤로 한 채 일본식 정원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서 있으면 바람에 떠밀린 대나무가 우는 소리와 함께 풍경 소리가 잔잔하게 들립니다. 마치 속세가 아닌 이곳을 나오면 동국사 한쪽에 위안부 소녀상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안내판을 읽은 여자 아이들이 소녀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군요. 아픈 역사가 이곳에서는 위안을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좌) 동국사 대웅전의 풍경과 그 뒤편의 대나무 숲.
(우) 동국사에 있는 작고 앙증맞은 석상.
외부와 내부가 모두 독특한 이영춘 가옥
이영춘 가옥의 전경.
군산간호대학교 교정으로 들어서면 언덕 위에 저택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처음 본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끼실 겁니다. 벽체만 해도 바닥은 돌이고, 중간까지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통나무를 올렸고, 그 위쪽으로는 회벽입니다. 거기다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돌을 얇게 잘라서 얹은 형태입니다. 내부도 벽난로와 샹들리에가 있는 서양식 거실과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방이 혼재되어 있어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죠. 값비싼 재료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비용이 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이 저택의 원래 주인은 구마모토 리헤이입니다. 나가사키 출신의 그는 게이오 대학 재학 중에 우연찮게 조선으로 건너와서 여행을 하던 중에 군산에 정착합니다. 그는 군산 인근의 토지를 사들여서 대농장을 세우는데 면적이 무려 1천만평에 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작농만 3천명에 가족까지 다 합치면 2만 명이 넘었고, 농장의 사무를 보는 직원만 50여명이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큰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로 경성과 도쿄에 거주했고, 이곳에는 주로 수확 철에만 내려왔다고 합니다. 내려와 있는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언덕 위에 있어서 창문을 열고 자신의 농장을 한 눈에 내려다봤을 겁니다. 광복이 되고 그가 쫓겨난 이후에 이 집의 주인은 이영춘 박사로 바뀝니다. 구마모토 농장의 병원인 자혜의원 원장이었던 그는 주민들의 요청을 받고 계속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이 저택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좌) 복잡한 지붕선 한쪽으로 굴뚝이 높게 솟아있다.
(우) 이영춘 가옥 내부의 일본식 방. 바깥으로 복도와 유리창이 있다.?
탁류가 흐르는 곳, 채만식 문학관
채만식 문학관의 모습.
군산역 근처, 금강이 흐르는 강변에 채만식 문학관이 2001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는 군산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군산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채만식의 소설 속에서는 군산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작인 탁류의 무대도 바로 이곳입니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금강의 모습이 아주 자세히 묘사하는데 특히 조용히 흐르다가 강경에 이르면 물이 탁해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금강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고향 앞을 흐르는 강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혼탁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죠.
한적한 마을이었던 군산은 개항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지만 모두 일본인의 것이었습니다. 1902년에 태어나서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예과에서 공부한 채만식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을 겁니다. 탁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초봉이나 정 주사, 그리고 고태수의 모습을 통해 글자 그대로 혼돈에 빠진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이런 시대상을 묘사합니다. 채만식은 고향인 군산 앞에 흐르는 금강의 탁류를 보면서 절망적인 현실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치숙의 발표 이후 본격적인 친일문학인의 길을 걷습니다. 배 모양으로 지어진 채만식 문학관에는 채만식의 생애와 혼란, 그리고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문학관의 2층 베란다에서 볼 수 있었던 금강의 모습입니다. 채만식이 말한 탁류 대신 맑고 깨끗한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좌) 채만식 문학관 내부 모습.
(우) 채만식 문학관 2층에서 바라다 본 금강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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