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 권혁주 01.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 (Carpe diem, quam minimum crdula postero) 퀸두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Quintus Horatius Flaccus) 집 외관모습 침대에 누워있는 권준우 핸드폰이 울린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눈을 뜨고 핸드폰을 바라보다 핸드폰으로 손을 향한다.
권준우 : 여보세요? 권준우가 스피커폰 버튼을 누름 상대방 : 선생님. 어제 잘 들어가셨죠? 다름이 아니라 요즘 다른 대학에서 철학과 폐지논란이 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 학기에는 신규 강좌를 대폭 개설하려고 하거든요.. 아마도 정원미달 되는 수업은 폐강조치가 될 것 같아요. 사실 지난 학기에 선생님 수업이 미달이었잖아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강의 계획을 좀 더 신경써주셨으면 해서요... 권준우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염. ‘촤악 –‘ 상대방 :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여보세요? 선생님? 선생님..?? 권준우가 한 손에는 핸드폰을 한 손은 안경을 들어올리려 함
*권준우(39세, 철학강사) 침대에 걸터앉아서 생각하는 준우. ‘하아... 이제 나도 곧 마흔인데 뭐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철학하면서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드네..’ 침대에 누워버리는 준우. ‘어휴!! 이제와서 강의 계획을 또 어떻게 바꾸냐고!! 배고프다 나란 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먹을 생각을 하는구나.. 학생들에겐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했는데..쳇!’
냉장고 안을 바라보며 ‘이럴 때는 역시 스파게티 만한 것이 없지. 기분도 좀 그런데 볼로냐 스타일로 만들어 볼까?’ 방울토마토, 양파, 스파게티소스, 소고기, 돼지고기 재료모습 ‘흠.. 파르메자노 치즈가 있으면 좋을텐데..’ ‘싹둑’ 양파를 써는 모습 ‘우선 양파를 썰어볼까’ ‘탁탁탁’ ‘오늘의 블로네즈는 우울함을 다스리기 위한 요리로 만들자’ ‘탁탁탁’ ‘그러니 기름에 좀 더 관대하자.’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름 ‘주르르르’
채썰은 양파를 후라이팬에 넣음 ‘자아의 본질은 실존적 결핍.. 배고픔에서 시작된다. 너와 나 자아와 타자 변증법적으로 뒤섞이고..’ 소고기(100g), 돼지고기(100g) 후라이팬에 고기가담겨있고 후추를 뿌림 ‘인식론적으로 뒤틀리면서 그렇게 조금씩 나의 우울감을 조금 안정시키는.. 영혼의 양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냄비에 면이 삶아지고 있음 방울토마토를 손질함
‘그리고.. 요런건~ 카르페디엠!’ 권준우 :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음식에도 본질적인 것들이 분명 존재하고 철학적 사고는 어느 곳에나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음식과 철학을 합친다면..? 어떻게 될까??’ 깨달음을 얻은듯한 권준우
‘그 사이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진 않을까? 이번 학기엔 철학과 음식을 접목시켜서 강의계획을 세워보자! 철학이라는 재료 위에 음식이란 양념을 넣어서 잘 섞어주면...’ 방울토마토와 양념을 넣고 볶으면서 ‘어떤 맛이 날까? 강좌명을 "맛있는 철학"으로 지어볼까?’ 완성된 스파게티
권준우 : 나도 참.. 혼자 먹는데 왜 모양까지 낸거지.. ‘후루룩~’ 스파게티를 먹는 권준우 권준우 : 음~ 괜찮은데? 권하연 : 다녀왔습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음 ‘털썩~’ 권준우 : 어? 하연아? 너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권하연의 모습이 처음나옴 권준우 : 마침 잘 왔네! 아빠랑 같이 밥 먹자~ 권하연 : 싫어. 권준우 : 정말? 너가 좋아하는 볼로네즈 스파게티인데?
장면이 바뀌며 방안에서 일하고 있는 권준우 ‘칸트가 그랬다. 철학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철학하는 것 배울 뿐이라고. 학생들에게.. 철학책이 아니라 요리를 하면서 철학하는 법을 알려주자!’
- Delisophy- 오늘의 요리
기차를 타고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가는 중이었다. 아니, 그 반대였던가. 이런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내게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 하나가 있는데, 그건 열차가 한 경유지에 정차하면서 창 밖으로 보였던 표지판, 그 위에 새겨져 있던 ‘볼로냐(Bologna)’라는 이름이었다. 내리지도 않았던 도시의 표지판이 가장 선명한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볼로네즈!
역명을 보자마자 당장에 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려서 본고장 스파게티의 맛을 보고 싶었다. 일정이 없는 마구잡이 여행이었다면 정말로 내려서 맛 없는 식당 두어 곳을 돌고 난 뒤에야 맛있는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한 그릇 찾아내어 겨우 반쯤이나 먹고 부대끼는 배를 감싸며 다시 밀라노로 향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지 못한 아쉬움에 그 표지판은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물론, 그때 볼로냐에 내려서도 내가 원하던 스파게티는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토마토와 소고기 갈은 것을 냄비에 넣고 한참을 끓여 만든 소스는 ‘볼로네즈’가 맞지만, 스파게티라는 파스타는 훨씬 남부의 나폴리에서나 즐겨먹는 면이라고 했다. 볼로냐 지방에선 스파게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로냐에선 탈리아텔레(Tagliatelle)를 먹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난 아직 탈리아텔레의 넙적한 식감에 익숙하지 못하고, 소스를 만들 때에도 항상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쓴다.
나는 늘 내가 모르는 ‘탈리아텔레 볼로네제(Tagliatelle Bolognese)’ 의 맛을 상상만 할 뿐이다. 아, 그때 볼로냐에서 내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