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후, 평창으로 가는 길은 스산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부연 소독약이 자동차를 휘감았다. 사라지지 않는 구제역 탓이었다. 마치 내 자신이 세상을 떠돌다 병든 소가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농경의 시절, 고향집 외양간을 지켰던 소와 돼지와 닭들이 죽어나가는 세상이다. 그냥 죽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살처분을 당하고 있다. 그런 즈음에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봉평
평창의 봉평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과 「산협(山峽)」의 무대다. 이효석은 일찍 고향을 떠나 서울과 함북 경성, 그리고 평양에서 살며 소설을 썼다. 서른여섯 해라는 짧은 세월을 살다 떠나간 작가는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 서른이 되던 해인 1936년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을, 「산협」은 사망하기 전 해인 1941년에 발표했다. 평창 진부 일대가 배경인 「개살구」는 1937년 《조광》이란 잡지에 실렸는데 이 세 편을 ‘영서 삼부작’이라 부르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편의 소설 속에는 당시 강원도 평창 일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봉평에 들어가면서 날짜를 확인하니 전날이 봉평 장날이었다. 사실 장날이 지나간 장거리 풍경은 쓸쓸하기만 하다. 동이가 낮부터 술에 취해 수작을 벌이던, 충주집 자리임을 알리는 표석도 응달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가 달빛 아래에서 나귀의 방울소리를 들으며 대화 장으로 걸어가는 그 흐뭇한 육칠십 리 밤길도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이조차 찾기 힘든 장거리를 걸으며 그 옛날의 장돌뱅이들과 각다귀들, 취객들을 상상하는 일도 손만 시릴 뿐이었다. 구제역 파동으로 당분간 오일장까지 폐쇄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도는 판국이기에. 어서 빨리 봄이 찾아와 이 골 저 골에서 무사히 겨울을 난, 등이 굽은 미륵들이 주름살 가득한 손을 잡으며 장거리 가득 반가운 인사를 풀어놓기를 바라며 장거리를 나왔다.
△ 이효석 상
매년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무대 옆 가산 공원의 이효석 상은 잎이 모두 떨어진 돌배나무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공원은 흰 눈밭이었다. 누군가의 발자국들이 그 주변에서 얼어가는 오후였다. 그날 밤 대화 장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린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도 필경 돌배나무를 지나 물을 건너고 메밀꽃과 달빛 흐뭇한 밤길을 걸었으리라. 그리고 여름밤 물레방앗간의 성서방네 처녀와 얽힌 기막힌 하룻밤의 얘기도 나왔으리라. 아비 없이 자랐다는 동이의 한탄도 개울물 소리에 풀어져 밤새 흘러갔을 것이다.
물레방아가 있는 뒤편 야트막한 산자락 위에 이효석문학관이 있었다. 한 시절 진부의 골짜기에서 머물렀던 소설가 김성동 선생이 쓴 현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보기에 좋았다. 얼었던 마음이 왠지 조금씩 풀렸다. 전시실에는 피아노 옆에 앉아 계시는 선생이 안경 너머로 시간이 흐른 뒤의 바깥세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짐짓 선생의 눈을 피해 전시실을 서성거리다가 옛날 봉평 장터를 상상해서 만든 모형물에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 떠났다.
「산협」의 무대인 봉평 남안동 역시 눈에 덮여 있었다. 주인공 공재도가 소를 끌고 소금을 받으러 멀리 문막까지 갔다가 소 한 필을 여자(원주집)와 맞바꿔 돌아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내용이 그 줄거리인 소설이다. 더군다나 그 소는 조카인 증근이 씨름을 해서 상으로 받은 소였다. 이 모든 게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증근과 공재도의 아내 송씨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다. 원주집의 임신에 자극 받은 송씨는 무당의 말을 믿고 인근 월정사로 기도를 드리러 떠나는데 증근이 짐꾼으로 동행을 한다. 그런데 일찍 돌아온 증근의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다. 더욱이 원주집의 본 남편이 아내를 되찾기 위해 찾아온다(중략). 잠깐 소설 밖으로 나가보면, 당시 일제는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대관령과 평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막 닦은 뒤였다. 마을사람들은 증근의 방황이 거의 신작로에 홀린 것으로 보았다. 결국 증근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동차를 보았다는 신작로를 통해 사라졌다. 그래, 신작로가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증근이 보았다는 그 신작로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며 가슴을 설레곤 했다. 답답한 시골구석에서 대처로 도망칠 수 유일한 길이었기에. 증근의 말을 들어보자.
“크고말고. 신작로는 한없이 곧게 뻗친 위를 우차가 늘어서고 자동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아나데. 자동차 처음 보고 뜨끔해서 길가에 쓰러졌다네. 돼지같이 새까만 놈이 돼지보다도 빠르게 달아나거든. 우레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세상이 넓지. 마당 같은 넓은 길을 걷고 있노라면 이 산골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어져. 어디든지 먼 데로 내빼구 싶으면서.”
같은 대관령 길에서 살았던 나는 증근의 말을 백 번 이해한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눈 덮인 남안동을 훑어본다. 멀리 눈 덮인 언덕 위 낡은 집 한 채가 보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파국으로 치달은 소설 속 그 집인 것만 같다. 증근은 떠났고 증근과 삼촌댁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죽고 만다. 원주댁이 낳은 아들은 본 남편의 자식이었다. 그렇다면 공재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부
이효석의 또 다른 주소지는 진부로 되어 있다.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와 142번지. 앞의 번지에는 일제 때 신사가 있던 석두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산 밑이고 뒤의 주소는 현재 진부초등학교 앞 한전건물 맞은편이다. 진부 면장으로 재직했던 이효석의 아버지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 한 곳이 있다. 바로 소설 「개살구」에 등장하는 집이다. 강릉집이었다가 서울집이라고 불리던 집이 바로 그곳이다. 항용 살구나뭇집이라고 불리던 곳. 굵기는 아름드리인데다 얘기로는 오대 선조부터 내려왔다는 나무가 뒷마당에 있는 집. 더구나 당시로는 귀한 함석집이었다.
오대산에 산을 가지고 있던 형태는 신작로가 생기는 바람에 박달나무를 팔아 떼돈을 벌게 된다. 당연한 절차로 형태는 강릉에 가서 색시를 첩으로 데려다놓았는데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달밤에 도망가 버린다. 그래서 이번엔 멀리 서울에 있는 여자를 다시 데려온다. 그이가 서울집이다. 이 집 또한 만만치 않은 풍파가 몰려온다. 그 풍파에 휘말린 사람들은 역시 새로 생긴 신작로를 통해 하나둘 사라진다. 큰 길이라는 게 그렇다. 오기도 쉽지만 떠나가기도 쉽다. 사실 진부에는 오대산 나무를 팔아 부자가 된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면 첩을 들였고 그 첩에게 눈독을 들이는 자가 생긴다. 그리고 도망친다. 대처로. 그런 이들은 당분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소설 속 서울집에서 일을 거들던 옥분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사랑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형태의 나무를 우마차에 싣고 강릉으로 운반하는 남자였다. 옥분은 진부에서 십오 리 떨어진 월정거리로 애인을 만나러 간다. 월정거리는 오대산에서 나와 진부와 강릉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그곳에 가보았다. 옛날 그 거리에 있었던 늙은 버드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들여다봐도 감감하다. 언제 내 유년의 나무가 사라졌는지.
날이 저물기 전에 나는 포장된 길을 달려 영서 삼부작의 무대를 떠난다.
- 글
- 김도연_소설가. 1966년생.
소설『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산문집 『눈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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