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견딜 수 없는 영혼의 출구 김동리의 『역마』와 『황토기』
김동리가 1948년에 단편소설 「역마」를 발표했으니, 내가 새벽바람을 헤치며 차를 몰아 화갯골에 도착한 것이 「역마」의 주인공 성기가 엿판을 등에 걸쳐 메고 고향을 떠나던 때와는 육십여 년의 시차가 있을 것이다. 성기가 장날마다 책전을 열기 위해 쌍계사에서 내려오며 손이라도 담갔을 화개 계곡을 오른편에 두고 1023번 지방도로를 내달렸다.
쌍계사 가는길
△ 쌍계사 가는길
화개 삼거리에서 쌍계사 입구까지는 벚꽃이 지천이었다. 협곡으로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가던 중에 산길 특유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려낸 절경(絶景)을 만났다. 도로 양쪽으로 수십 년은 자랐을 법한 우람한 벚나무 터널이, 나사처럼 돌아가는 도로 사이의 경사면을 따라 삼단 형태로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중앙선이 있어야할 도로 가운데에 벚나무를 심어 흰 꽃잎이 하늘 높이 두둥실 떠있는 듯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벚꽃 터널을 걷는 관광객을 위해 백여 미터의 목재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위아래 길을 오르내리게 만든 목재 계단은 그 소용에 못지않게 보기에도 멋들어졌다. 지리산 뒷줄기의 경치가, 성기가 살던 옛날이라 하여 이보다 못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속세의 나쁜 이야기를 듣고 와 귀를 씻었다는 인근의 세이암은 오히려 성기에게 고향을 떠나고 싶은 욕구를 재촉했는지 모른다.
쌍계사
△ 쌍계사
성기에게는 핏줄처럼 내려오는 역마살이 있었다. 한 스님의 권유로 성기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역마살을 풀려고 절간에 들어갔다. 하지만 핏속을 둥둥 떠다니는 역마끼는 그에게 목탁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거나 글공부에 전념할 수 없게 하였다. 어머니는 성기를 주저앉히려고 장가를 보내기로 했으나 기묘한 운명과 맞닥뜨리고 만다. 마음에 두었던 계연이 하필이면 배다른 이모라는 운명.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야 하는 운석 같은 우주의 질서와 마주쳐야하는 성기의 절망은 어떠했을까? 그는 떠돌이 중이었던 아비처럼, 안주하지 못하는 어미처럼, 체를 팔러 다니는 할아버지처럼 막막한 대지로 떠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성기가 화개를 떠나는 날이다. 어머니의 주막과 쌍계사가 있는 화갯골과 작별하느라, 계연이가 떠나간 구례 쪽을 짚어보느라, 성기는 화개 삼거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절벽 아래로 섬진강의 시퍼런 물줄기가 굽이쳐 흘렀다. 이윽고 등에 엿판을 둘러매고 가위를 잘강이며 역마살의 운명에 휩쓸려가는 성기는 슬프기 짝이 없는, 그러나 구성진 콧노래를 부른다.
성기와 계연의 만남
△ 성기와 계연의 만남
계연과의 이별
△ 계연과의 이별
지금, 성기의 어머니 옥화가 막걸리를 팔았던 화개장터엔 지리산 화전민이 말려서 내다놓은 듯한 건채와 봄나물이 그득하다. 장터 중앙광장 한편에 엿장수가 판을 차려놓고 신나는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있다. 무른 엿을 입에 넣고 《역마공원》을 구경하는 사이 즉석 관광객 합주단이 엿장수의 북과 장구를 멋대로 빌려 장단을 맞춘다. 나는 북소리를 듣고 모여든 할머니 패의 춤판을 보며 해방 전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였다는 화개장의 신명이 저러했을 거라 짐작한다. 막걸리 몇 잔에 불그레해진 검게 그을린 늙은이의 얼굴은 쓰다듬어주고 싶도록 아름다웠다. 성기도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엿가위의 장단으로써 일에 곤하고 지난한 운명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리라 짐작해본다.
화개 터미널
△ 화개 터미널
화개장터
△ 화개장터
「역마」의 성기와 달리 끊어진 산의 기운으로 펴지 못한 운명이 있었으니 이는 「황토기」에서 만날 수 있다.
단편「황토기」는 풍수를 볼 줄 아는 적국의 장수가 이곳에서 중원을 넘볼 만한 큰 장사가 태어날까 두려워하여 산의 혈을 끊었거나, 두 마리 용이 등천에 실패하자 슬픔에 겨워 흘린 안타까운 피가 일대를 붉게 물들였다는 황토골의 유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황토골에서 태어난 억쇠는 제 아무리 엄청난 힘을 가졌다한들 가마솥 안의 콩알 신세일 뿐이었다. 특별한 힘은 사람들에게 경원시됐고 그는 넘치는 완력을 이기지 못해 밤새 바윗덩이를 들고 산이나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억쇠는 자신과 비등한 힘을 가진 득보라는 사내를 만난다. 억쇠는 그가 마음에 들었고 득보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징검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두막을 지어 살게 되었고, 어디서도 풀 수 없는 힘을 서로에게 풀며 지내게 된 것이다. 둘은 자주 새벽이 될 때까지 원망도 없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는 했다. 계절 따라 하늘이 내리는 비와 같은 순리에 순종해 오던 농사꾼인 억쇠와 달리 대장장이에다 살인까지 한 득보는 왈패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싸움을 거는 득보가 싫지 않은 건 억쇠의 가슴에도 바윗덩이처럼 들어앉은 울분 때문이었을 게다. 그들은 엉켜 싸웠고, 죽도록 술을 마셨고, 심지어 한 여자를 나눠 사랑을 했다. 결국 득보는 질투심에 불타는 여자에게 칼을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둘은 타고난 힘이 봉인된 비극적인 운명을 이제야 떨쳐내고 “사내 새끼로 생겨나, 방 안에서 자빠지기가 억울”해서 넓은 세상으로 나설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위의 두 작품은 「무녀도」,『을화』, 「바위」등과 함께 소설가 김동리의 문학을 대표한다. 김동리의 문학 세계에서 가장 큰 흐름은, 갑갑한 현실에 갇혔으되, 주어진 운명을 이해하거나 맞서려는 인간형을 그린 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종교(도교, 기독교, 불교 및 샤머니즘을 포함한)의 세계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 초기 작품들은 자연 자체의 원시성에서 뿜어져 나온 인간 생명의 신비함과 허무적인 운명을 그렸다. 시대적 상황과 지식인의 고민을 다룬 그의 작품은 한국적 특수성을 인류적 보편성으로, 한국적 인간상을 보편적 인간상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집요함을 드러낸다. 기독교 문헌에서 취재한 대표적 장편 『사반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질서를 대조시켜, 인간의 운명과 구원의 문제를 추구한 역작이다. 또한 단편 「등신불」에서는 불교의 소신공양이라는 극한의 수행 과정을 택한 한 인간의 숭고함을 그렸다. 이같이 김동리 문학 정신의 기조는 인간성 옹호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지만 때로는 그의 문학세계가 인간 존재의 신비감과 삶의 허무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현실을 배제함으로써 비역사적인 신화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과 창작상의 투철한 장인 정신, 절제된 문체, 완결적인 구성 등으로 한국 문학의 한 장관을 보여주었음이 분명하다.
김동리의 자연에의 애착은 그가 부헝듬(동쪽으로 튀어나온 듯한 두 개의 산)과 칡넝쿨로 뒤엉긴 숲과 푸른 이끼로 덮인 원시적인 늪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에 연유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인간에게 씌운 운명에 대한 탐구와 종교적 구원에 대한 모색은 일제 강점기에 항거한 독립지사인 맏형과 유교 집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의 성품을 성찰하면서 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섬진강
△ 섬진강
나는 화개장터에서 점심으로 국수를 한 그릇 말아 먹은 후, 「역마」의 성기가 서성였던 화개삼거리 강변에 서보았다. 가지에서 떨어진 벚꽃이 봄바람에 분분히 흩날린다. 왠지 그날 계연이가 운명의 장막에 가로막혀 떠나게 된 전라도 구례로부터 오늘 꽃바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과장스런 감정에 젖는다. 정말 바람은 구례에서 섬진강을 넘어 지금 경상도 하동 땅에 선 내게로 불어오는 것 같다. 마치 성기의 신명을 품은 역마살의 기운이 작가 김동리의 펜 끝을 거쳐 내게 전해진 것처럼, 순간 가슴이 뜨겁다.
엄창석_소설가. 1961년생.
소설『슬픈 열대』, 『황금색 발톱』, 『유혹의 형식』, 『어린 연금술사』, 『비늘 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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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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