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역사의 가시면류관 - 장충단로

역사의 가시면류관 장충단로
1990년 재일 설치 미술가 최재은에 의해 경동교회의 옥상에는 대나무가 빽빽이 심어졌다. 나는 그 때 경동교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푸른 대나무들로 꽃꽂이 된 경동교회는 “부정형의 벽들을 하늘 위의 한 점을 정하여 하나로 이루어지게 하고, 그 형성된 벽들의 외부를 하나하나의 부서진 벽돌을 사용하여, 성전을 짓기 위한 인간의 고뇌와 노력을 부조하듯이 새겨갔다. 인간만의 순수한 뜨거움이 느껴지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한 건축가 김수근의 말처럼 신을 향한 고딕의 간구 그 자체로 보였다(일본의 저명한 꽃꽂이 공예의 대가인 데시가하라 밑에서 디자인과 꽃꽂이를 배운 최재은은 성철스님 사리탑을 만들었다). 최재은의 작업은 마치 이 건물을 설계한 김수근의 마지막 의도처럼 그렇게 장충단로의 하늘을 향해 가시 면류관처럼, 부정형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장충단 길은 남산 국립극장에서 동대문까지 뻗어있는 길이다. 그 동쪽으로는 서울 성곽이 평행하게 뻗어있다. 이 길이 장충단로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물론 장충단 때문이다. 장충단은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다.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 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공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 장충단이다.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현충원과 같은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지만,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는 이곳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거기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영혼을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그것도 모자라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시던 경복궁 선원전을 옮겨다 본전과 부속건물을 짓고, 또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의 대문으로 세웠다. 장충단 자리에 무슨 마가 끼었는지, 이 자리는 기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 장충단은 조선시대 어영청(御營廳) 소속 수도방위 5군영 중의 한 분영인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소영(小營:작은 군영)이란 이름과 달리 1백94칸의 대규모 청사를 갖추었으며 영내에 별도로 52칸의 화약고, 북쪽으로 1백37칸의 남창(南倉)을 거느리고 있었다. 작은 군영인데도 이런 규모를 갖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소영의 본영인 어영청은 1623년 인조(仁祖)가 정변을 일으킨 바로 그 해, 새로 떠오르는 후금(後金)에 맞서 정벌을 준비해야 한다며 설치한 군사기구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가 1652년 효종(孝宗)때에야 이완(李浣) 장군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고 북벌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생각과 달리 신하들에게 북벌은 하나의 당파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고, 따라서 북벌에 대비한 모든 군사체제도 그 의미를 잃어갔다. 자연히 남소영도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갔다.
▲ 《남소영도》 김홍도, 종이에 담채, 43.7 ×32.5cm, 고려대학교박물관
지금 우리가 당시의 남소영을 조금이라도 짐작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김홍도가 그린 남소영 풍경이다. 그런데 거기에 군사들은 없고, 뜬금없이 연회가 진행되고 있다. 청 정벌의 꿈이 좌절되면서 남소영은 한갓 연회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894년 남소영은 폐지되고 만다. 수백 칸의 전각들은 어찌되었는지 모르지만 장충단이 설치된 고종황제 때는 남쪽 기슭의 백운루(白雲樓)만이 스산하게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북벌의 꿈이 깨지고 같은 자리에 다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을 기리는 숭고한 뜻이 들어서게 된다. 고종황제는 황태자 순종에게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를 쓰게 하고 민영환(閔泳煥)의 글로 비석을 세웠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현충원인 장충단이 태어났다. 장충단은 그 후에도 일제에 저항한 인물들을 계속 배향함으로 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반일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그 당시의 민중들은 장충단을 이렇게 기렸다.
남산 밑에 지어진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모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 분네.

《한양가》중에서
그러나 이러한 기개는 다시 일제에 의해 접혀야 했다. 일제는 이 뜨거운 상징을 불편해 했다. 1908년부터 제사가 금지됐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아예 비석을 들어내 숲 속에 버렸으며 사전(祀典)과 부속 건물을 폐쇄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탄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3ㆍ1민족해방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하고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 연못, 어린이놀이터, 다리를 시설하여 '뜨거운 상징'을 놀이공원화 했다. '공원'이라는 말 자체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마는, 지금 우리가 아무 의식 없이 공원이라고 하는 말에는 일정 부분 일제의 의도가 숨어있다. 사직단은 그냥 사직단일 뿐이다. 장충단은 그냥 장충단일 뿐이다. 굳이 거기에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데도 우리는 계속 아무 생각 없이 공원이라고 한다. 사직단을 공원이라고 부를 때, 그 장소의 역사성은 사라져버린다. '이름 붙이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이름은 역사를 지우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제 장충단 터의 불운은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토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문사는 해방 후 동국대학교의 기숙사로 쓰이다가 1945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 후 1946년 군이 창설되어 각지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奬忠祠)에 안치함으로 해서 장충단은 잠시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1956년 동작동 국립묘지가 세워지자 다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등장한다. 이 시기 장충단 터에는 중앙공무원교육원, 반공연맹회관, 재향군인회관, 국립극장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심지어 박정희는 영빈관 부지 약 2만8천 평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주)임페리얼에 헐값인 28억4천4백20만 원에 팔아 버린다(이 회사는 이 계약이 끝난 후 없어졌다). 그리고 1973년 11월 1일 (주)호텔신라 기공식이 열린다. 설계와 시공을 일본의 다이세이(大成)건설(주)이 맡았다. 기가 막힌 것이, 이 회사의 전신이 약 40년 전 장충단을 파괴하며 박문사를 시공하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경희궁 흥화문을 해체하여 옮겼던 바로 그 오쿠라쿠미 토목(주)라는 회사였던 것이다. 다 알다시피 현재 신라호텔의 주 고객은 일본인이며, 2004년 일본의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를 개최한 장소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한복을 입은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시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리고 신라호텔을 지나 동호로를 건너면 수많은 원조 족발집이 있고, 그 아래에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가 나타난다.
장충단 길은 서울성곽을 따라 걷는 길과 겹쳤다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청나라를 향한 복수와,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산화한 이들에 대한 숭모와 일제의 찬탈, 그리고 친일의 잔재까지 이 모든 것들이 겹치고 풀어졌다 묶이는 길이다. 결코 길지 않은 이 길에서 일어난 많은 이야기들이 담배연기처럼 풀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 하는 얼굴로 다들 싫어한다.
함성호_시인, 건축실험집단 《EON》 대표. 1964년생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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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1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