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국악, 신민요의 등장, 갈아타기와 버티기의 기로에 선 소리꾼들

신민요의 등장, 갈아타기와 버티기의 기로에 선 소리꾼들
1934년 다동(茶洞) 다방골 조선권번 앞 한 주점.
빅타, 콜럼비아, 폴리돌 등 대형 음반사 관계자들은 신민요(新民謠) 가수 발굴을 위해 기생양성소인 권번(券番)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특히 초일류로 손꼽히던 평양 출신 기생들이 기거하던 조선권번 앞 주점과 다방에서는 이들 기생을 필사적으로 잡으려는 음반사와 호조건을 내세운 기생 간 밀당이 낮밤으로 계속되기도 했다.
신민요는 전통적인 민요 선율에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나 서양의 왈츠 등을 입혀 새롭게 선보인 대표적인 근대 음악으로 1910년대 중후반 일본에 유학했던 작곡가들이 20년대 중후반 대거 귀국해 활동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3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대중화 물살을 탔다.
특성상 전문적인 국악 교육을 받은 음악인들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각 권번의 얼굴 예쁘고 소리 잘 하는 기생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평양 기성권번의 왕수복, 선우일선, 김추월, 조백오, 김복희나 인천 용동권번의 이화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 등이 이 시기 신민요계에 발을 내디딘 대표적인 기생 출신 소리꾼이었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기생양성소인 평양의 기성기생양성소(기성권번)의 모습.
시창, 가무, 잡가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예기(藝妓)가 많이 배출되었다.
폴리돌레코드가 기생 왕수복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며, 음반시장을 위협하자 이에 자극받은 콜럼비아는 왕수복을 능가하는 민요가수 발굴에 혈안이 돼 있었다. 콜럼비아 음악부장은 조선권번 소속의 한 평양기생을 며칠째 찾아와 집요한 설득전에 들어갔다. 강홍식을 대스타로 키운 유명한 작곡가 김준영이 곡을 쓰고, 일본의 스타 작곡가 스기타 료죠(杉田良造)가 편곡자로 참여한다고 꼬드긴다.
▲ 동아일보 1933년 10월 2일자 3면에 실린 폴리돌 소속 왕수복의 음반 광고(왼쪽) 및 북한에서 활동하던 1952년의 왕수복(오른쪽 위) 및 1933년 발매된 왕수복의 대표적인 신민요 음반 《포곡성》
하지만 그 기생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수심가나 배따라기를 녹음하라믄 하갔지만 신민요 기거 왠지 남사스럽슴네다"며 손사래를 친다. 음악부장은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폴리돌이 왕수복에 이어, 선우일선을 가수로 데뷔시킨다고 경쟁심을 부추긴 것이다. 기생은 즉시 입장을 바꾼다. "노래만큼은 일선이보다 자신있다"며 득달같이 계약서에 사인한다.
음악부장은 두둑한 돈 봉투를 쥐어주고는 두 가지 조건을 던진다. '추월'이라는 기명이 촌스러우니, 새로운 예명을 사용하자는 것과 신비감을 주기 위해 광고할 때 얼굴을 가리겠다는 것. 예명은 새로운 사조의 음악임을 감안해 '미스코리아'로 작명했다며 잘 외우라 한다. 화들짝 놀란 기생은 아연실색하지만, 음악부장은 계약서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총총히 자리를 뜬다.
몇 달 후.
'격찬! 환호! 미스코리아', '일류 가수만 망라한 콜럼비아템 우승은 확실'이라는 콜럼비아사 광고가 방송과 신문을 도배한다. 일본에서조차 미스코리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 현상까지 빚어진다.
특히 눈 부분을 가린, 요즘으로 치면 티저광고가 대성공을 거둬, 미스코리아는 금세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탔다.
▲ 동아일보 1934년 8월 20일자 6면에 실린 미스코리아의 신민요 《마의태자》 광고(왼쪽) 및 가사지에 실려 있는 얼굴을 가린 미스코리아 사진
한낱 평범한 소리기생에 지나지 않던 김추월은 이제 '추월'이라는 촌스런 기생딱지를 떼고, 대신 '미스코리아'라는 글로벌한 이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것도 국제적인 연예인으로 말이다.
이처럼 전통음악을 학습한 국악인들 특히 기생들이 음반사들로부터 호조건의 러브콜을 받으며, 신민요와 대중가요 취입에 열을 올리는 이른바 '갈아타기'가 대호황을 이루는 시기가 급격히 도래했다.
음반사 입장에서는 별도의 학습이 필요 없는 데 따른 비용절감 효과 외에도 이름 있는 기생은 최소한 기존의 명성을 유지하므로 시장 개척에 대한 부담이 적다는 장점 때문에 '기생모시기'에 사활을 걸었고, 기생들은 국악과 양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간극이 너무나도 큰 시절, 이미지 개선 및 신분 상승의 효과를 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갈아타기에 열을 올렸다. 미스코리아 역시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경우였다.
▲ 미스코리아의 음반들. 왼쪽부터 콜럼비아에서 '미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신민요 《마의태자》 , 《금강산이 조흘시고》, 빅타레코드에서 '김추월'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베틀가》, 태평레코드에서 '모란봉'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한 《궁초댕기》. 모란봉이라는 예명 밑에는 '구명 미스코리아'라는 표기를 하고 있어 이채롭다.
특히 미스코리아가 데뷔한 1934년은 들불처럼 퍼져나간 '신민요'가 유행의 정점에 서 있던 해였다. 오늘날 퓨전국악의 효시로 손꼽히는 신민요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불후의 명곡과 명가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기생 박부용의 《노들강변》을 필두로, 강홍식의 《처녀총각》,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 이난영의 《봄맞이》 등이 이 즈음 발표되었다. 신민요계의 빅3로 꼽히는 선우일선, 이은파가 이 해에 데뷔했으며, 3대 아리랑 중 하나인 《진도아리랑》도 이 시기에 선보였다.
▲ 대표적인 신민요 가수인 인천권번 출신 이화자(왼쪽)와 평양기성권번 출신 선우일선의 모습
하지만 국악전승의 대표적인 음악집단이었던 기생을 앞세운 신민요의 활황은 반대급부로 전통음악의 위기를 초래했다. 양악화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국악은 매우 저급한 음악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대재생산 되었고, 전통음악인의 입지는 더욱 좁아져, 조그만 요리집이나 잔치집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잔치집에서 소리할 수 있는 요행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실력이 월등한 국악인들이었고, 그렇지 못한 국악인들은 주린 배를 걱정하며 거리로 나앉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제 갈아탈 것이냐, 버틸 것이냐는 단지 예술장르의 선택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기에 신민요 유행 초기 국악계는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심지어 대중가수조차도 신민요로 갈아타거나 아예 데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난영, 황금심, 박단마, 김용환, 고복수 같은 스타급 대중가수들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린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의 주요 레퍼토리가 《새날이 밝아오네》, 《돈타령》 같은 신민요였다는 점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악계에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원곡에 관현악을 입히는 작업이 유행을 하면서 '新'자가 붙은 국악곡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新作판소리》, 《新作민요》처럼 '신작'(新作)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거나 '신조'(新調), '신'(新)'자 가 붙은 많은 국악곡들이 기악, 성악을 따지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녹음되고, 방송을 탔지만 정작 신민요처럼 대중들로부터 크게 호응 받지는 못했다.
▲ 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동경 공연 중 대중가수 고복수 등이 신민요 《새날이 밝아오네》를 부르는 장면. 1939년 일본 동보영화사 제작 영화 《思ひつき夫人》 중에서
신민요의 영향으로 갈아타기가 대세로 굳어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의외로 많은 국악인들이 갈아타기를 거부하고 강단 있게 버티며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몇몇은 세를 규합해 사설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유행가 문화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시골을 찾는 틈새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특히 유랑극단을 통해 다양한 전통예술, 예를 들면 줄타기, 판소리, 재인청 춤 등 고급국악이 지역에 소개되고 또 수요가 증가하면서 '향제'(鄕制)라는 이름으로 전통예술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이들 예술집단은 그 지역의 전통예술을 발굴해 공연을 통해 소개하기도 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연물로 재창조해 보급하기도 하는데, 오늘날 널리 알려진 《정선아리랑》이나 '탈춤' 등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대표적인 전통물이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기생이라는 예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신민요의 열풍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처럼 194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시들해지고, 양악계나 국악계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에 집중함에 따라 모든 음악이 '군국찬양' 일색이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해방 직전까지 지속되면서 신민요의 실체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역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뿌리내리며 '갈아타기'의 유혹을 거부하던 국악인들 대부분은 해방과 함께 대한국악원 등 대규모 조직을 통해 활동을 강화하게 되고, 이들 대부분은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그 예능을 국가적으로 보호받는, 이른바 초기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글과 사진 제공
김문성_국악평론가. 1971년생
저서 『경기잡가』 『경기음악』(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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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1-2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