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가로등 아저씨


생각하는 동화 : 가로등 아저씨생각하는 동화 : 가로등 아저씨

“주호야, 얼룩 아저씨 너도 봤어?”
“응. 나도 어제 봤어. 진짜 신기해!”
주호와 지안이가 나누는 이야기에 민하가 진지한 얼굴로 나섰어요.
“선생님이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놀리거나 별명을 만드는 건 나쁜 일이라고 하셨어.”
“우리도 배웠거든. 그런데 얼룩 아저씨를 얼룩 아저씨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음…… 102호 아저씨로 부르면 되지.”
지난주 일요일,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은 민하네 집 건물 102호로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키가 무척 크고 머리카락이 많지 않은 아저씨는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짐을 옮기고 있었어요.
드러난 팔과 다리, 목과 얼굴에 있는 울긋불긋한 반점들로부터 아이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그런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102호 아저씨가 방긋 미소를 지었어요. 하얀 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온통 은색으로 빛나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답니다.
“낮에 저 아저씨랑 마주쳤는데, 아저씨 눈이 빨개서 깜짝 놀랐어.”
지안이가 말했어요.
“밤에 잠을 안 자고 일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엄마가 그랬는데, 102호 아저씨는 저녁에 출근하고 새벽에 들어온다고 했어.”
“아냐. 눈동자도 빨간색인 것 같았는데?”
“갈색 눈도 있고, 까만 눈도 있고, 초록색 눈도 있잖아. 빨간색 눈도 있는 거 아닐까?”
아이들은 남들과 좀 많이 다른 듯한 102호 아저씨가 궁금했어요.
“너희들…… 그거 알아? 아저씨 몸에 있는 얼룩을 어른들은 못 본다?”
“뭐?”
민하가 소곤소곤 들려주는 놀라운 정보에 아이들은 깜짝 놀랐어요.
“엄마한테 저 아저씨 몸의 얼룩은 어떻게 생겼을까 물었거든? 그런데 엄마는 아저씨 피부가 창백한 하얀색이라고 말했어. 얼룩 같은 건 못 봤다는 거야!”
“그게 뭐야. 엄마가 잘못 보신 거 아냐?”
“아닌 것 같아. 내가 건물 지킴이 아저씨한테도 물어봤거든? 그런데 아저씨도 얼룩은 못 봤다고 했어.”
“그럼 왜 우리한테는 보이는 거야?”
“이따 다시 확인해보자.”
날이 어둑해지고 102호 아저씨가 출근한다는 시간대가 될 때까지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며 기다렸어요.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는 102호 아저씨를 발견하자마자, 아이들은 놀이터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다른 아저씨에게 달려갔어요.
“아저씨! 저기, 저기 가고 있는 아저씨 보이세요? 혹시 그 아저씨 몸에 큰 얼룩들이 있어요?”
벤치의 아저씨는 이게 무슨 엉뚱한 질문이냐는 표정으로 아이들 얼굴을 한 번, 멀리 지나가고 있는 102호 아저씨를 한 번 쳐다보았어요.
“아니. 그런 건 안 보이는데. 이 땡볕에 타지도 않나, 피부가 하얗기만 한 사람이구만.”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오고 갔어요.

그 다음날부터 아이들은 놀이터에 모여 102호 아저씨를 매일 관찰했어요. 아저씨 몸의 얼룩은 어떤 날은 더 많아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더 적어지기도 했어요.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아이들의 궁금증은 날로 더 커져만 갔어요.
그렇게 한 달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학원에서 돌아오던 민하는 덩치 큰 아이 하나가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주호와 지안이가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어요.
“야, 너희들이 내 휴대폰 떨어뜨려서 망가졌잖아. 어서 물어내라고. 돈 없어?”
“저희가 떨어뜨린 거 아니에요. 형이 갑자기 와서 부딪쳤잖아요.”
“뭐? 내 앞으로 너희들이 지나간 거잖아!”
덩치가 언성을 높이며 친구들 앞으로 성큼 다가서자 민하가 그 앞을 가로막았어요.
“왜 그래요? 뭐가 망가졌으면 어른을 부르면 되잖아요!”
“넌 뭐야? 다치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빠져라.”
“그게 무슨 좋은 말이야? 내가 어른들 부를 거야!”
“이 쪼그만 게 진짜 겁이 없네.”
덩치가 눈을 부라리며 때릴 듯한 기세로 민하 앞에 다가섰어요. 그때 어디선가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만두지 못해?”
102호 아저씨였어요.
“이건 또 뭐야. 아저씨도 빠져요. 내 휴대폰 망가뜨렸으니 얘들이 물어내게 할 거라고요.”
“그 애들이 망가뜨린 게 맞아?”
“그렇다니까요?”
“너 저기 카메라 보여?”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가로등 중간에 설치된 방범용 씨씨티비 카메라가 있었어요. 카메라를 발견한 덩치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었어요.
“아저씨랑 같이 경찰서에 가자. 저 카메라에 다 녹화되어 있을 테니 잘잘못은 거기 가서 가리면 되겠네.”
덩치의 얼굴이 굳었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말했어요.
“아니에요, 아저씨. 휴대폰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그냥 갈게요.”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 덩치의 앞을 가로막고 아저씨가 말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일로 동생들을 다시 괴롭히면, 내가 기억하고 있다가 같이 경찰서에 갈 거다. 알겠지?”
덩치는 네, 하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달아났어요.
“너희들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다친데 없다니 다행이다. 많이 놀랐겠네.”
민하와 친구들을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던 아저씨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으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작게 질렀어요.
“얘들아, 그럼 집에 잘들 들어가렴. 아저씨는 출근이 늦어서 어서 가 봐야겠다.”


며칠 후, 동네에서 큰불이 났어요. 아이들은 놀이터에 모여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때, 102호 아저씨가 온몸이 거의 파란 얼룩으로 뒤덮인 채로 지나갔어요. 아저씨의 얼굴은 너무 아프고 지쳐 보였어요.
“아저씨!”
민하와 주호, 지안이는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에게 달려갔어요. 그러다 지안이가 넘어지고 말았어요.
“괜찮아?”
102호 아저씨가 지안이를 잡고 일으켜 주었어요. 지안이가 아저씨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우와 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어요. 지안이가 잡은 아저씨의 팔에 있던 푸른 얼룩이 반짝거리기 시작했거든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감탄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102호 아저씨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너희들…… 이게 보이는구나?”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비밀을 들려주었어요.
“나는 가로등에 붙어 사는 도깨비란다. 원래 살던 곳이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가로등들이 다 철거됐어. 그래서 살 곳을 찾다가 이 동네로 이사를 왔지.”
아저씨는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고, 가로등이 꺼질 늦은 새벽 무렵 퇴근한다고 말했어요.
“가로등은 눈꺼풀이 없잖니. 나는 그 안에서 눈도 감지 못하고,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지켜보고 있어야 해. 그러다 보면 온몸에 이렇게 얼룩이 생긴단다.”
“아프기도 해요?”
“그렇지. 멍이 드는 것과 같아.”
“이 노란 얼룩은요?”
“이런…… 부끄럽구나. 가끔 술 먹고 가로등에 오줌 싸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럴 때면 이런 누런 얼룩이 생겨 더 괴로워.
그런 날은 다음 날 다시 나와 물청소도 해야 하지.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도깨비로 사느라 얼마나 고단한지 너희는 모를게다.”


아이들은 도깨비를 실제로 보게 된 것도 신기했지만, 그 도움도 받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이 믿기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어쩌다 가로등에 사는 도깨비가 되셨어요?”
민하의 질문에 아저씨는 잠시 주저하다 대답했어요.
“그러게. 아까 너처럼 친구들을 위해 나설 용기가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사람일 적에 나는 늘 도망만 다녔거든.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돕다가 내가 다치는 게 무서웠어. 그래서 지금은 눈꺼풀이 없는 가로등으로 사는 벌을 받고 있나보다.”
민하는 가로등 도깨비 아저씨가 가엾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어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민하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았어요.
그러자 아저씨의 손부터 어깨까지 가득하던 울긋불긋한 얼룩이 천천히 점점 반짝거리기 시작했어요.
“신기하네. 얼룩진 자리가 이제 아프지 않아.”
아저씨가 놀라워하며 말했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힘들게 모든 것들을 보고 있는 걸 사람들이 알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주호의 말에 아저씨는 슬픈 얼굴로 답했어요.
“가로등은 아무 힘이 없단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에 뭐든 더 하려고 하는 거야.”
지안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가로등이 있어서 우리가 안전하게 이 길을 다니고 있어요. 아저씨는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는걸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맞아요. 아저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가로등 도깨비 아저씨를 둘러싸고 위로의 말을 건넸어요. 아저씨 몸의 얼룩들이 더 예쁜 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어요.
때마침 주변의 나무들에 앉은 매미들이 떼에엥 하고 환호를 지릅니다.
“신기하구나, 얘들아. 나는 계속 멍들고 냄새나고 아픈 얼룩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줄 알았거든.
이렇게 아프지도 않고, 이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빛나게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아저씨가 출근하는 가로등으로 함께 걸어갔어요.
“비밀 지켜줄 수 있지?”
“네! 물론이죠.”


이제 아이들은 가로등을 지키는 도깨비 아저씨와 친구가 되었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지켜보는 고통들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로 했어요.
어른이 되어도 아저씨 몸의 얼룩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랐어요.
그래야 아픔도 알아채고, 반짝거릴 때 같이 웃을 수 있을 테니까요.
정여랑
글 / 정여랑

동화작가, 소설가

저서
동화 『엄마 나무를 찾아요』,
장편소설 『5년 후』, 소설집 『언니 믿지?』 등



작성일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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