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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밀림에서 표류하는, 혹은 좌초된 유배자들의 이야기

 

명작순례 : 밀림에서 표류하는, 혹은 좌초된 유배자들의 이야기명작순례 : 밀림에서 표류하는, 혹은 좌초된 유배자들의 이야기

SUMMARY

냉정한 현실 묘사
총 18편의 단편소설
아르헨티나 영화

명작순례 : 밀림에서 표류하는, 혹은 좌초된 유배자들의 이야기명작순례 : 밀림에서 표류하는, 혹은 좌초된 유배자들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

1878년 우루과이 살토에서 태어나 193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을 마감한 오라시오 키로가는 라틴아메리카 붐소설의 바로 앞선 세대로서 20세기 초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발표된 키로가의 작품 대부분은 단편소설로, 그는 2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단편소설의 미학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레오폴도 루고네스, 알폰시나 스토르니, 호세 엔리케 로도,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 등 당대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대표적 경향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원 중 하나로도 평가받는다. 동시에 현실에 대한 냉정한 묘사를 바탕으로 죽음, 질병, 가난, 노예와 같은 노동, 예기치 못한 사고, 알코올 중독, 환각 등 극한의 상황에 놓인 존재들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사진 1. 산이그나시오 예수회 유적
사진 1. 산이그나시오 예수회 유적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에는 그의 초기작부터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고루 엄선된 총 1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두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브라질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주를 거쳐 흐르는 파라나강을 따라 펼쳐진다. 숨 막힐 듯한 더위와 가뭄이 계속되다가도 큰비가 내려 강물이 크게 범람하기도 하는 곳. 미시오네스의 밀림과 파라나강 유역은 17세기에 예수회가 선교를 위해 30개의 정복지 원주민 보호구역을 만들었던 곳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노리는 원주민 노예사냥과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다. 또한 19세기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동맹군과 파라과이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삼국동맹 전쟁이 벌어져 국경선이 크게 변화했던 곳이며 이후 마테 차밭과 벌목장에서 반노예 상태로 일하던 월 단위 계약제 노동자, 일명 달품팔이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빚의 굴레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작업장을 탈출하다 채찍질을 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그리고 당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유럽 이민자들이 낯선 땅에 흘러들어와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사진 2. 달품팔이 기념비
사진 2. 달품팔이 기념비
달품팔이의 기구한 인생

달품팔이들의 기구한 운명은 「달품팔이」와 「따귀 한 대」에 잘 드러나 있다. 아르헨티나 포사다스에 있는 달품팔이 거리에는 뗏목 위에서 기타를 짚고 서 있는 달품팔이와 그의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은 빈사 상태의 달품팔이를 형상화한 기념비가 있는데, 이 모습은 꼭 「달품팔이」의 두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또한 아르헨티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인 마리오 소피치 감독의 영화 <대지 위의 죄수들>(1939)은 미시오네스 지방의 마테 차밭에서의 노동 착취에 대해 다룸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영화사에서 최초의 사회 고발 영화로 여겨지는데, 이 영화가 바로 키로가의 「따귀 한 대」, 「일꾼」,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호평 받은 단편집 『유배자들』

1926년에 출판된 『유배자들』은 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얻게 된 단편집이다. 그중 여섯 편—「아나콘다의 귀환」, 「유배자들」, 「타콰라 대나무 저택」, 「죽은 남자」, 「인시엔소 나무 지붕」,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달품팔이의 삶을 전전하다 이제는 늙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두 노인, 작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 산이그나시오의 유적지를 둘러보러 왔다 이곳에 눌러앉은 거구의 후안 브라운, 말 없는 후안 브라운의 옆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술을 마시는, 한때는 인간이었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폐인이 된 화학자 므시외 리벳, 파라과이 군복 반바지에 기름때가 전 흰 베레모를 걸치고 지팡이를 휘두르고 다니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의사 엘세, 그리고 돈은 없지만 언제나 아이디어로 넘쳐나는 낙천적인 외팔이 기계공 뤼세르의 이야기가 산이그나시오 유적지 옆에 자리잡은 선술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제각기 사연을 품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맞지 않는 기후와 환경에 고생하며 살아가지만 다시는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마치 유배자와도 같은 삶을 사는 존재들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작품 세계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도시를 사는 사람들이 독사에 물릴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안전한가.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나.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일상은 언제든 종결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일들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무섭지만, 책을 덮을 때는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비가 새는 걸 막기 위해 끊임없이 지붕을 고치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죽을 듯 애쓰는 「인시엔소 나무 지붕」의 오르가스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니까.

임도울
글 / 임도울

역서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등

※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202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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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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