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곳곳에 위치한 조선시대 표석을 찾아다니며 과거의 자취와
현재의 모습을 기록한 소설가 김별아의 <도시를 걷는 시간>은
조선시대 표석에 담긴 삶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일상을 깨우고 있습니다.
표석이란, 표시나 특징으로 어떤 사물과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 세운 돌을 말합니다.
하지만 국어사전의 이러한 형식적인 의미 외에도 표석은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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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근방에 위치한 노인정 터. 조선시대 때 나이가 많은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로소’가 있던 곳입니다. 이 기로소에는 주로 정이품의 문관들이 입소했지만 간혹 임금들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처럼 서울에만 약 322개(2021년 7월 기준)의 표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표석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민들 사이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그저 낡고 낡은 돌조각 정도로 보일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말해주듯 낡은 표석 안에 담겨 있는 기록들은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하지만 김별아 작가의 <도시를 걷는 시간>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신랄하지만 거기에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을 투명하게 담아냄으로써 한 편의 세련된 에세이로 탄생했습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인 광화문역, 종각역, 을지로입구역 근처에는 다양한 표석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범죄자를 포획하거나 죄인을 심문하던 관아인 포도청, 현재의 감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전옥서, 그림과 관련된 일을 맡아 보던 도화서까지,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의 중심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역사적 현장이 모두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의 한가운데 이와 같은 표석이 있었다는 건 그 근처를 자주 지나가던 시민들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누구나 일상 속에 숨겨진 역사를 찾아보고 직접 걸어볼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하지만 표석만 본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이 책은 당시 조선시대의 상황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소설 <미실>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는 김별아 작가의 깊이와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 책은 김별아 작가가 약 1년 6개월 동안 연재한 글을 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 본인의 인생 이야기도 간간이 엿볼 수 있는데,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역사 해설에 솔직 담백한 개인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형식입니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표석만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독자들을 매료시킬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김별아 작가는 수천 수백 년 전 바로 이곳에서 살았던, 이 땅을 밟고 지났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며 그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면, 과연 남은 사람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누구나 고민해보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속 흔한 지하철역 입구부터 교육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학교,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표석 터까지, 작가가 가는 곳과 역사적 사실들은 하나같이 무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많았지만, 워낙 복잡하고 어렵다 보니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죠. 이 책은 도심 속 표석을 찾아가는 그 과정에 작가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 덧붙여지는 형식이라 한결 부담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순우리말까지 적당히 들어가 있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에게도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을지로입구역 앞에서 영화 <왕의 남자>의 명장면들을 잠시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또, 음악의 편찬을 맡았던 장악원에서 신나는 노랫가락을 읊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역사는 언제나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