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명문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대를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한 한 청년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학과 물리학 개인 교습을 하겠다는 과외 광고를 신문에 낸다.
청년은 광고를 보고 찾아온 철학과 학생과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다가
과외수업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토톤 모임을 만들어 운영한다.
과외 대신 토론 모임을 만든 이 엉뚱한 청년은 4년 후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 그가 바로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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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취리히 연방 공대를 간신히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교수들에게 추천서를 받지 못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물리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은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업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비판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에 과외 광고를 실어보지만 엉뚱하게도 과외 대신 토론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2년, 아인슈타인은 다행히 친구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 특허청에 심사관으로 취직하게 된다.
특허청에 근무하던 아인슈타인은 주6일 근무를 하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사고 실험’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구체화했다. 사고 실험이란, 물리적 증거가 없는 아이디어나 가정의 결과를 상상을 통해 현실화 해보는 연구 방법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끝에 아인슈타인은 1905년 무려 5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중 한 논문에 등장한 ‘상대성 이론’으로 인해 과학계는 발칵 뒤집힌다. 이후 대학교수로 임용된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고, 뉴턴의 고전 역학을 마감한 인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1910년 아인슈타인은 처음으로 노벨상 후보자에 올랐지만, 그로부터 무려 11년 동안이나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이는 노벨위원회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그의 상대성 이론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노벨위원회도 이를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1922년 ‘상대성 이론’이 아닌 ‘광전 효과 법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억지로 주는 상을 굳이 가서 받을 필요는 없다며 노벨상 시상식에 가지 않았고, 상금은 모두 아인슈타인의 전처에게 지급되었다.
1927년 전 세계의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이 모이는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당시 주목받고 있던 ‘양자 역학’을 거세게 반대한다. 과학은 인과 관계를 통해 설명해야 한다고 믿는 아인슈타인이었기에 불확실성과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양자 역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과 함께 양자 역학을 반박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양자 역학은 이후 활발한 연구를 통해 현대 물리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연구한 이론들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는 현대 물리학의 시초가 아닌 고전 물리학의 위대한 종결자로 남게 된다.
MBTI는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한 자기 보고식 성격유형지표로, 다음과 같이 4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4가지 지표를 조합하여 총 16개의 성격 유형을 구분한다.
INTP는 흔히 아이디어 뱅크라고 불리는데, 다양한 상상력을 실제로 시도해보고 탐구하는 것을 즐기는 유형이다. 생각하는 일을 그만하라고 할 정도로 사고가 발달했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시도하고, 상상으로 실현해보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그러나 반대로 감정이 발달하지 않은 특성 탓에 주변의 방해에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계획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실행력이 뛰어난 유형이다
주변 사람들의 고민에 대해 자꾸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는데, 상대방과 마음으로 공감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생각이 많기 때문에 용두사미 같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단시간 내에 실현 가능한 것을 현실에서 마무리 짓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