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신여성 - 윤미현

 
신여성 ? 윤미현 신여성 ? 윤미현
1924년 『개벽』 48호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의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도시하층민의 운명을 추적하며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오늘 김종광 최진영 정찬 윤고은 강석경 조경란 등 여섯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으로 운수 좋은 날을 새롭게 그려냅니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시점과 가까운 순서대로 작품을 배치하였습니다. 현진건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5화 운수 좋은 날 - 강석경

야. 너네 할머니가 마늘밭에서 호미를 들고 달려와서, 집에서 낮잠 자고 있던 너네 할아버지 이를 부러뜨렸단다. 하여튼지 간에 너네 할머니, 보통 여자는 아니야. 엄마는 그러면서 또 웃었다.

한밤중에 아빠는 부엌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화장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아빠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다. 나를 붙잡고 뭔가 신세한탄을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너희 할머니가 말이야.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열세 살 때였는데. 감자밭에서 너희 할머니가 너희 할아버지한테 감자를 무슨 눈덩이 던지듯이 던지고 있었어. 생각해 봐. 눈덩이를 맞아도 아픈데, 돌덩이 같은 감자를 하염없이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어. 너희 할머니는 감자란 감자는 전부 다 캐서 너희 할아버지한테 집어던졌지. 그리고는 이 무식한 놈아, 하면서 소리를 질러.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그런데도 너희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흙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는 감자를 한데 모으기만 하고. 너희 할아버지는 너희 할머니한테 온갖 무시를 당하며 살았어. 못 배웠다고. 너희 할머니는 너희 할아버지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놈이라고. 틈이 날 때마다 소리를 질러댔어. 많이 못 배운 게 너희 할아버지 탓은 아닌데. 그뿐만이 아니었어.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에 너희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오시질 못했어. 너희 할머니는 너희 할아버지가 내 졸업식에 오는 것을 싫어했거든. 어디 시골 달랑무 같은 촌스러운 영감탱이가 신성한 학교에 오냐고 하면서 난리를 치는 통에. 너희 할머니는, 그 시절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거든.

아빠는 소주 한 잔을 쭉 들이키더니, 한 번 더 소리를 높였다.
신여성이었으면 다냐고?
아. 뿔. 싸. 그 바람에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그냥 처음처럼 너희 할머니가 말이야, 하면서 소주병을 앞에 두고 연극배우가 담담하게 독백하듯 읊조렸으면 좋았을 텐데. 왜 갑자기, 감정을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풀려서는.
너희 할아버지는 평생을 너희 할머니한테 맞고 사셨어. 그래서 골병들어 집에 누워서 눈만 끔벅끔벅하고 있는 사람한테 달려들어서는. 기어이, 남은 이 두 개까지 뽑아 버리다니.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는.

아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연기인가? 싶었다. 그럼 소주는 울기 위한 소품이었던 건가?
가엽다. 너희 할아버지. 한평생 감자보다 못한 취급이나 당하고. 얼굴에는 항상 감자 크기만한 멍이 들어서는. 너 그거 아니? 감자가 햇빛 받으면
시푸르게 변하잖아. 그런 멍이 너희 할아버지 얼굴에 늘 박혀 있었어. 너희 할머니는 감자를 밭에 심은 게 아니라, 너희 할아버지 얼굴에
심으셨지. 해마다. 그렇게 평생.

정말 감자 같은 소리만 하고 자빠졌네.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디 원양어선 탈 자리 있나 알아보기나 해.

엄마는, 지금 그렇게 놀고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잖아, 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보고 참치잡이나 하라고? 하. 참치라……
참치가 싫으면 세네갈 근처 바닷가에 가서 갈치잡이를 하던지.
엄마는 한숨을 쉬며 나를 봤다. 회사 때려치운 지 벌써 일주일째다. 아, 그럼 엄마가 아빠를 잡아먹듯이 한 이유가 그거였어? 두 번째 갱년기에 들어선 엄마가 감정 조절을 못 해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러니깐 아. 아. 엊그저께 엄마는 갈치꼬리 같은 눈을 하고서는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냐? 그래서 아빠는 조금 뻘쭘했는지,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하면서 방으로 들어갔었다.

남자가 오죽이나 못났으면.
엄마는 냉장고에서 깍두기처럼 잘라놓은 당근을 꺼내며, 아빠를 봤다.
원양어선 힘들면, 어디 가서 시멘트나 나르시던지.
내가 돈 버는 기계냐?
아빠는 소주잔을 소리 나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맞춰 엄마가 아빠 앞에 앉았다. 아, 이렇게 되면…… 이 장면은 꽤 길어질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마흔다섯에 쟤 가졌을 때, 내가 낳지 말자고 했지? 그랬어? 안 그랬어? 바락바락 우겨서 낳자고 해서 낳았더니. 지금 뭐하자는 건데? 쟤. 지금 중2이야. 그 무섭다는 중2.
엄마는 특히 중2를, 강조했다. 나도 특별히 내색 안 하고 있는 중2라는 타이틀인데. 엄마가 저렇게 함부로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금 소주나 마시면서 노닥거리기나 할 때냐? 제정신 아니지?
엄마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건 또 무슨 때아닌 신파? 인가 싶은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깐 넷플릭스보다는 재밌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파도 제대로 된 신파면 볼 만하니깐. 엄마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더 꺼내더니, 냉수 마시듯이 아주 시원하게 들이켰다. 한 번에 원샷.
저렇게 행동하는 건 아빠처럼 술 먹고 난 후에, 울어버리겠다는 심산인 건데. 역시나 엄마는 처절하게 울기 시작했다.

이 집 대출금 어떻게 할 건데? 쟤 학원비는?
딱 일주일 쉬었어.
아빠는 흙 속에 파묻힌 십 원짜리 동전처럼 볼품없이 대꾸했다. 그 말에 엄마는 내가 못 살아, 못 살아, 하면서 식탁 위에 얼굴을 묻었다.
꼭, 내가 벌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아빠가 소심하게 반격했다. 그러니깐 흙 속에 파묻힌 십 원짜리 동전이 엄마 발에 걷어차여서, 살짝 드러낸 것 같은.
그럼 누가 벌어야 하는데? 중2가 나가서 벌어오리?

엄마는 나를 봤다. 왜 또? 나를. 목욕탕 탕 속에 끌고 들어가듯, 나를 끌고 들어가나? 싶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아빠는 분명 대사를 독백처럼 처리했는데, 엄마는 그 말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들었다. 마치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부부싸움할 때는 저렇게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너?
엄마는 아빠를 봤다.
그래. 너.
아빠는 그 말을 내뱉고, 홀가분하다는 듯이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로 당근을 씹어 먹었다. 비틀거리며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열 받은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너.
아빠는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딕션이 아주 훌륭했다.
너. 연애할 때 나한테 뭐라고 했어? 강남 갤러리아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하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
쇼핑 같은 소리하네.
뭐?
엄마는 당황해했고. 그 김에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몰랐던 때 했던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너야말로 제정신 아니지? 어떻게 날마다 쇼핑 생각만 하고 사냐?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네 꿈이 무슨 쇼핑의 신 같은 거냐?
아빠는 거침없이 대사를 날렸다. 정말 이거. 이렇게 되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전자레인지에 팝콘이라도 돌려야 하나, 싶었다. 맨 정신에
맨숭맨숭하게 그냥 보고 있기도 그러니깐.
너는 왜, 나에게 신세만 지고 사니?
아빠는 멈추지 않고 대사를 쳤다.
뭐?
엄마의 목소리는 다시 흔들렸고.
그러는 너는, 왜 나에게 신세만 지냐고.
아빠는 엄마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일도 안 하고 노는 주제에,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얼씨구.
누가 할 소리를? 내가 일할 때, 너는 소파에 누워서 당근이나 씹어 먹으면서 낮잠이나 잤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는
기가 막힌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말 제대로 돌았구나. 엄마의 반격은 힘이 없어 보였다. 아빠에게 돌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돌았으니깐, 너하고 살고 있지. 제정신이면 살겠니? 아빠는 이제 그만하자며, 소주잔을 치웠다. 어떻게 나에게 이러니?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너 혹시 전생에 사탄이었냐? 나만 보면 일하라고 닦달하고 돈 가로채고. 왜? 전생의 그런 기억이 슬슬 기어 나와서
주체를 못 하겠지? 아빠는 엄마를 보며, 넌 분명 전생에 사탄이었을 거라고,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부부싸움할 때 왜 칼을 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엄마는 아빠는 보며, 칼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신여성 ? 윤미현

그럼 나는 이제 집에서 칼싸움도 보게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정말 이래저래 생각해 봐도 칼은 아닌 것 같다. 부부싸움에 볼품없이 칼 같은 소품을 사용하는 건 반대야. 폼 나게 총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뭐? 엄마는 나를 봤다. 칼은 본인이 먼저 말했으면서, 저 표정은 또 뭔지. 어차피 누구 하나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칼 같은 소품은 필요 없는 거잖아? 뭐? 엄마, 아빠가 동시에 물었다. 이럴 때는 또 합이 잘 맞네, 싶다. 부부싸움을 할 때만큼은 최고의 궁합을 보여준다. 내가 아까 전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칼 말고, 죽창 같은 것도 있으니깐. 칼보다는, 죽창이 소리가 덜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쓰는 돈이 문제라면 학교는 자퇴하면 그만이고. 자퇴하면 학원은 안 다녀도 되는 거니깐. 오히려 그렇게 되면 나는 좋지. 그러면 당분간은 별문제 없지 않아? 그러니깐 집에서 칼부림은 하지 말라고. 학교 안 간다고 돈 안 들어? 하다못해 머리카락을 자르더라도. 엄마는 나를 봤다. 머리야 뭐. 바리캉 하나 사서 식구들 전부 다 삭발하면 그만이지, 나는 바리캉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말했다.

신여성이 집에 도착했다. 아무리 그 시절에 C여학교를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라고 해도 당뇨와 고지혈증과 높은 콜레스테롤은 피하지 못하나봐?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다이어트를 위해 당근을 씹어 먹던 엄마가, 아빠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신여성인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받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우리집에 온다. 사실, 엄마는 나에게 우리집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여러 번 지적했는데. 여긴, 우리집이 아니라 은행 집이라고, 몇 번을 말하니?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우리, 집이라고 해 버릴 때가 많다.

할머니는 오드리 헵번 머리모양을 하고, 왔다. 본인은 그게 오드리 헵번 머리모양이라고는 했지만, 전혀 달랐다. 할머니는 늘 머리에 쪽을 졌다. 비녀를 꽂았다. 너는 날마다 집에서 뭐하고 있냐? 깨인 여자는 그렇게 안 산다. 할머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말이야. 경운기를 맨 처음 몬 여성이야. 또, 충청남도에서 제일 먼저 면허증을 취득한 여성이고. 콤바인도 몰 줄 알고. 안면도 최초의 여성 이장 출신이고.

어머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희숙 아빠가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래?
할머니는 그게 뭐 대수냐, 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나는 할머니에게 배고픈데 자장면이라도 시킬까, 하고 물었다. 곱빼기 시켜라. 할머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아빠는, 짬뽕을 먹는다고 했다.
그럼 자장면 곱빼기 하나, 간자장 하나, 짬뽕 하나 주문하면 되겠네?
너희 엄마는? 안 먹는다냐?
엄마는 다이어트한다고 당근만 먹고 있는데……
토끼도 아니고. 당근은 무슨. 꼴값은.

자장면을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여성인 할머니는 자장면 곱빼기를 먹다가, 안방 문을 쳐다봤다.

왜 저러니?
할머니는 나를 봤다.
아무래도 아빠가 세네갈 근처 바닷가로 갈치 잡이 원양어선을 타러 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 할머니도 엄마하고 같은 여자인데, 서로 말이 안 통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 여자가 여자 마음을 몰라주니깐 더 서러워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 아무래도 이 세상은 너무 잔인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런 것 같은데.

어머니. 제가 이러고 살아요. 아빠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난리인가 싶었다. 할머니는 우선, 자장면부터 먹고 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안방에서 엄마는 아빠보다 더 크게 울었다. 할머니는 머리에 꽂은 비녀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나는 엄마가 저렇게까지 우는데, 안 들여다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는 외할아버지 사진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엄마하고 나하고 먹여 살리려고 그 고생을 하셨는데. 나는 어쩌다가 저렇게 책임감 없는 남자를 만나서는. 엄마는 흐느꼈다. 이미 흐느끼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상태여서, 거실까지 잘 들렸을 것이다. 어차피 거실에 있는 사람들 들으라고 한 얘기니깐.

그럼 둘 다 원양어선 타러 가면 되겠네.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엄마가 일어나서 안방 문을 벌컥 열었다. 방문을 연, 타이밍은 꽤 괜찮았다.
뭐라고요?
둘 다 타라고.
애는 어쩌고요?
내가 데리고 있으마. 너도 일을 해라. 나는 C여학교 다닐 때, 그렇게 안 배웠다.
어머니, 그 얘기 좀 그만하세요. 그 C여학교 B사감 얘기하는 것 같은데.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그 B사감도 남자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어도,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어요.

그건 잘못된 이야기다. 그 옛날 기숙사에 있었던 여학생들이 지어낸 얘기였어. 내가 C여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B사감은 지팡이를 들 만큼 늙었는데도. 늘 남자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어. 나는 그 선생을 존경한다. 너도 남자에게 의지하지 말고, 일을 하면 얼마나 좋니?

아빠는 할머니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는 청소년기, 즉 중2는 무엇보다 정서적 안정이 중요한 시기인데, 애를 두고 어떻게 일을 하러 나갈 수 있겠냐고 했다. 나는 정서적인 안정보다, 앞으로 우리 집의 경제적인 안정을 더 원하는 편이라고 소신 있게 대답했다. 엄마는, 너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르니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엄마와의 정서적 유대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훗날 네가 주부가 되어서도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이지 네가 우울증에 걸린 주부가 되어, 계절도 분간 못 해 한겨울에 비키니나 입고 슈퍼에 가는 꼴을 정말이지 볼 수가 없어. 그런 꼴을 내가 어떻게 볼 수 있겠어? 여기서 진도가 더 나갔다가는, 이도저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난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토종닭이나 먹으면서 사는 게, 더 건강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엄마는 이러려고 내가 결혼을 한 게 아닌데,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아빠도 나도 이러려고 결혼을 한 게 아니야, 하면서 분노를 폭발했다.
신여성의 남편은 감자를 먹고 있다가, 나를 보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는데, 관절염이 심해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웃으며 나에게 손짓을 했다. 할머니는 희숙이네와 같이 사업을 할 거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농사를 꼭 사업이라고 했다. 두 달 전에 결정된 일을 지금에서야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때 엄마와 아빠가 짐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엄마는 그러니깐 앞으로 여기서 저보고 풀이나 뽑으면서 살라는 말이죠? 하면서 할머니를 봤다. 그 말에 할머니는 풀 뽑으라는 소리는 안 했다, 그래도 너희 둘이 원양어선 타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 이게 현실적이지, 하면서 엄마를 봤다. 엄마는 경운기는 위험해서 몰 수 없어요, 하면서 벌써부터 위험에 처해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골에서 생활하려면 경운기 움직이는 것은 냉수 마시듯 해야 하는 건데. 쯧쯧. 할머니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럼 희숙이 아빠는 뭐 하고요?
뭐 하기는? 집에서 밥도 하고, 나물 캐다가 삶기도 하고, 할 일 많지. 봄이면 쑥 뜯어다가 쑥떡을 하던지, 쑥국을 끓이든지 하겠지. 잔심부름도 할 테고. 우리가 일할 때 새참도 내와야 하고.
네?
엄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이미 저 얘기는 서울에서도 골백번은 더 한 얘기인데. 할머니는 여자가 바깥일을 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일이라고 엄마를 타일렀다. 앞으로 분명 전 세계적으로 식량부족 위기가 올 것이고. 거기에 대비만 잘하고 있으면,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신여성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그럴싸해 보였고. 그동안 요지부동이었던 엄마도 당근 먹기를 멈추고, 할머니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온 건데. 엄마는 또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윤미현

〃 작가소개 〃

윤미현 극작가

연극 「우리 면회 좀 할까요?」 「텃밭킬러」 「평상」 「텍사스고모」 「철수의 난」
「경복궁에서 만난 빨간 여자」 「크림빵을 먹고 싶었던 영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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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7-0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