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생각하는 동화 황금을 훔치는 거인 글, 작성유 생각하는 동화 황금을 훔치는 거인 글, 작성유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이 세상에 매머드가 돌아다니고, 매머드를 쫓아 짐승 가죽옷을 입은 인간들이 사냥을 하고, 밤이면 동굴의 모닥불 옆에 모여 앉아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하루의 피곤을 녹이던 때의 이야기다.

그때는 이미 신들도 인간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을 때였지만 혼자 조용히 숲속을 헤매며 꽃잎과 나뭇잎을 오래 들여다보거나, 작은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가 보이면 그 결심을 잊고 말을 걸어 친구가 되기도 하였는데, 또마라는 사내아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사실 신들은 아이들하고는 늘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신나게 노느라 신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듣지 못했다.

또마와 신들이 만나는 비밀 장소는 큰 나무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동굴이었다. 또마가 들어가 누우면 딱 맞는 크기였다. 또마가 거기서 만나는 신은 ‘라후라’라는 남신과 ‘아후라’라는 여신이었다. 신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또마는 신들과 얼마든지 얘기를 나누었다. 또마는 궁금한 게 정말 많아서 처음엔 신들을 만날 때마다 마구 질문을 퍼부었지만 신들도 바빴기 때문에 이제는 하루에 한 가지만 질문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날은 아침에 눈을 뜨니 온 세상이 마법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어서 또마는 쉽게 그날의 질문을 결정했다. 동굴에 누워 신을 기다리자 마음 한 귀퉁이가 햇볕에 쏘인 것처럼 따뜻해졌다. 또마는 신이 온 것을 알았다. 오늘은 라후라 신이 왔다는 것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무어랄까, 느낌에 손가락이 달려 있어서 신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의 아이야, 오늘의 질문은 무엇이냐?”
“신 아저씨, 흰 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나요?”
“오늘 내가 하얀 눈을 흠뻑 뿌려준 게 좋았나 보구나. 그렇지만 흰 눈에 대해 얘기를 하려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프다.
그 얘기를 하자면 먼저 작고 사랑스러운 동물, 토끼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 한단다. 자, 마음을 열고 잘 듣거라.”
잔잔한 신의 목소리가 또마의 가슴속에서 물결이 번져나가듯이 울려 펴졌다.

옛날 옛날에 나와 아후라가 처음으로 지구를 꾸밀 무렵에는 이 세상에 눈이란 게 없었다. 지구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비가 내리기는 하였지. 비는 자주 내렸다. 지구가 좀 울보냐? 지구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리면 보슬비가 내렸고, 통곡을 하며 펑펑 눈물을 쏟으면 물난리가 났다. 지구는 워낙 마음이 여려서 무얼 보든 잘 감동하고, 잘 슬퍼하였지. 그럴 때마다 흘리는 눈물이 적당한 비를 뿌려주었다. 사실 비는 이 세상에 꼭 필요했지만 눈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계절은 늘 봄과 여름만 왔다 갔다 하였을 뿐 겨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웬일인지 다른 날보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니, 들판 한구석이 눈부시게 하얗더구나. 자세히 보니 하얀 양떼와 흰 염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그 옆으로 하얀 비둘기떼, 하얀 공작새 무리가 즐겁게 재재거리며 놀고 있었고, 하얀 나비들이 나풀거리며 날고 있었다. 거기다 하얀 배꽃, 사과꽃이 활짝 피어서 바람에 하얗게 날리고 있었고……

우연히도 그렇게 하얀색을 가진 것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어떤 빛깔이든 한꺼번에 모이면 나름대로 아름다운 법인데, 하얀색은 특히나 정결하고도 눈부셨다. 그 광경이 어찌나 아름답고 상쾌한지 나는 얼른 아후라를 불렀다. 우리는 한동안 즐겁게 하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아후라가 말했다.
“우리 하얀 것들을 모아 무언가 새로운 동물을 하나 만드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오. 음, 어떤 동물을 만들까? 일단 몸빛은 깨끗한 흰색이어야 될 테고……”
“거기다 털은 길고 하얗고, 몸은 작아야 해요. 저 평화로움을 나타내야 하니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동물은 절대로 안 돼요.
풀만 먹고 살아야 해요. 온순하고, 착하고, 귀엽고……”
“허허, 그렇다면 겁을 많이 불어넣어야겠군. 그래야 조심을 할 테니.”
“맹수들이 다가오는 걸 잘 알게 아주 기다란 귀를 붙여주자고요.”
“잘 도망가야 할 테니 다리도 길고……”
“산꼭대기로 잘 뛰어 올라가게 뒷다리를 길게 만들어요.”
“흰색에는 붉은색이 잘 어울리니 붉은 당근을 먹게 하고, 당근을 잘 갉아먹으려면 앞니 두 개를 크게 만들고……”
“아휴, 생각만 해도 너무 사랑스러워요! 눈도 아예 붉은색으로 할까요?”
“짙은 노을처럼, 루비처럼 빨간 눈동자를 만들어줍시다. 하얀 몸에 빨간 눈동자!”
“울음소리는 어떤 소리가 어울릴까요?”
“소리가 나면 큰 짐승들에게 들켜요.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마음으로 서로 말을 할 수 있게 만듭시다.
그리고 똥 누다 잡아먹혀도 안 되니까, 뛰어가면서 똥을 퐁퐁 누게 해주는 거요.”
“호호, 그럼 까맣고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저 염소 똥 같은 걸 누게 해야겠군요.”
생각하는 동화 황금을 훔치는 거인
그리하여 그날 우리는 신나게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냈다. 이 지구에 하얀 토끼 한 마리가 태어난 거란다. 하얗고 긴 털에 빨간 나무 열매 같은 눈동자를 가진, 긴 귀에 긴 뒷다리에, 달리면서 똥을 퐁퐁 누고, 소리를 내지 않는 작은 동물이었지. 양과 염소와 흰 공작과 흰 비둘기는 이 새로운 친구를 마음 깊이 환영하였다. 호랑이, 사자, 늑대, 여우도 토끼를 매우 환영하였지. 너무나 맛있게 보이는 먹이였으니까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하지만 토끼는 여간 날래지 않아 잡아먹는 게 쉽지는 않았다. 부스럭 소리만 나도 귀를 쫑긋거리며 얼른 도망갔고, 얼마나 재빨리 산 위로 뛰어가는지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거기다 우리는 이 토끼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다른 맹수들이 토끼를 잡으려고 쫓아가면 갑자기 발을 삐게 한다든지, 눈앞을 가린다든지 해서 토끼를 놓치게 했단다. 신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우린 그때 그 토끼를 특별히 예뻐하였다. 어떤 동물만을 특별히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게 신의 나라의 규칙이지만 금방 만들어낸 생물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을 좀 품더라도 용서가 되었다. 우리도 마음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꾀로 보면 여우를 따를 짐승이 없는데, 이 여우가 토끼를 먹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여우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밤마다 꿈속에서 토끼를 잡아먹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우의 마음은 그것으론 달래지지 않았다. 여우는 자나 깨나 토끼를 잡아먹을 생각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구가 또 슬퍼해서 비가 내리던 날이었지. 여우는 오늘이야말로 토끼를 잡겠다고 동굴을 나섰다. 지구가 슬퍼서 우리에게 무언가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야말로 토끼를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거였다. 우리의 눈도 피할 수 있고, 땅도 미끄러우니. 여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빗속에 산을 뛰어오르던 토끼는 그만 주르르 미끄러졌다. 우리는 그때 지구를 달래느라 정신이 쏠려 토끼가 절박하게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말았다. 여우에게 잡힌 토끼가 마지막으로 낸 비명 소리를 먼저 들은 건 아후라였다. 아후라 또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우리의 토끼가!”
우리는 놀라서 세상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토끼는 여우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토끼의 하얀 털만이 비에 젖은 땅바닥에 후줄근하게 널려 있었다. 화가 난 아후라는 지구에게 소리쳤다.
“지구여! 당장 눈물을 그쳐라!”
나는 아후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신의 어깨가 후들거렸다. 나는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 가슴 또한 누군가 칼로 그어대듯 아팠으니까. 슬픔에 젖은 아후라는 당장 동서남북 온 바람을 다 불러 모아 바닥에 떨어진 토끼의 털을 온 세상에 날리게 하였다. 하얀 토끼털이 날리는 것을 본 양과 염소와 흰 공작과 흰 비둘기들도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며 털과 깃털을 날렸다. 사과꽃과 배꽃도 눈물을 흘리며 꽃잎을 날렸다. 깃털과 털과 꽃잎들이 온 세상에 하얗게 나부꼈다.

우리의 슬픔이 어찌나 컸던지 세상은 처음으로 얼어붙었다. 봄과 여름밖에 없던 세상에 겨울이 생겨났다. 하얗게 날리던 가엾은 토끼의 털과 친구들의 털과 깃털, 꽃잎들은 어느새 눈이 되어 나부꼈다. 지금도 겨울이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려 도망치는 하얀 토끼들을 살그머니 숨겨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나는 토끼의 눈동자를 잊지 않기 위하여 한 그루 나무도 만들었다. 바로 마가목이다. 마가목의 빨갛고 동그란 열매는 죽은 토끼의 붉은 눈동자를 나타낸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마가목은 한겨울에도 빨간 열매들을 달고 있다. 하얀 눈이 내릴 때 빨갛게 빛나는 그 열매는 바로 토끼의 눈동자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다. 토끼 한 마리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겨울이 생기고, 흰 눈이 오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이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하였다.

얘야, 사람의 아이야, 눈이 내리면 이제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지만 지켜주지 못한 토끼 한 마리를 떠올려다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지켜주지 못한 수많은 존재들의 아픔을.

또마는 토끼가 여우의 입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는데 리후라 신이 말했다.
“자, 눈을 떠라 사람의 아이야.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눈은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또마의 꿈속에서는 수많은 햐얀 토끼들이 무서운 여우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 중 한마리가 잡히게 되자 토끼들은 모두 그 토끼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그 수많은 토끼들이 순식간에 거대한 한 마리의 눈 토끼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여우는 너무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또마는 환성을 질렀다. 환성을 지르다 잠에서 깬 또마는 살짝 동굴 밖을 내다보았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토끼들은 제 발자국을 잘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글 / 이경혜(1960년생)_동화작가
동화 『마지막 박쥐 공주 미가야』, 『사도사우루스』, 청소년소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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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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