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더 와이프 글_이대현 영화평론가 더 와이프 글_이대현 영화평론가

내가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 내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 우리는 대서양 35,000피트 상공에서 질주하고 있었음에도 고요하고 평안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처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미국 여류 소설가 메그 월리청의 소설
『더 와이프』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와 그는 45년을 함께 산 노(老)부부이고,
아내인 나, 조안은 세계적 권위의 헬싱키 문학상을
받으러 핀란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고요하고
평안하다는 착각에 빠졌던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한다.
조안의 나이 예순넷이고,
그녀의 남편인 조지프(조) 캐슬먼은 일흔한 살이다.

소설 『더 와이프』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황혼이혼’ 이야기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인간 심리와 내면 묘사에 탁월한 소설가인 남편과 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 남편 뒷바라지에 자식들을 기르면서 묵묵히 살아온 아내가 어느 날, 그것도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작가로서 모든 것을 이룬’ 그 최고의 순간에 결별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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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연코. 확실히. 100퍼센트다. 내 세 아이들은 떠났고, 떠났고, 떠났다. 마음을 바꾸게 할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무서워 그만둘 일도 없다.’ 평생을 살다 뒤늦게 부부 사이가 틀어져 헤어지기보다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감정과 마음의 결과이기에 대부분의 황혼이혼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때문에 청춘의 사랑과 이별처럼 감정적이거나 격정적이지 않다. 그저 남은 삶을 그렇게 시작하고 걸어가고 싶다는 담담하고 냉철한 선택이다. ‘새로운 단계, 참을 수 없는 단계’여서 오히려 지금까지의 단계(결혼생활)처럼 평안하고 자신 있다. 차이라면 하나는 그 평안이 ‘착각’과 ‘위선’이었고, 하나는 ‘깨달음’과 ‘진짜’란 것이다.

조와 조안은 대학시절 글쓰기 강의의 교수와 학생으로 만났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과 결혼. 그것을 위해 둘은 삶의 소중한 것을 버렸다. 조는 아내와 어린 딸을 버렸고, 조안은 학교와 조가 재능을 인정한 작가로서의 꿈을 버렸다. 대신 조안은 그 꿈을 남편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남편의 작품에 소재를 주고, 인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자신보다 못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남편 대신 소설을 써주고 그의 성공에 대리 만족해했다.

그녀가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은 욕망 때문이었다. 한 가지 욕망이 아니다. 젊은 글쓰기 교수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 넘치는 열정을 가진 그를 남편으로 만들겠다는 욕망. 선배 작가인 일레인의 말처럼 세상을 지배하고, 문학세계를 지배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작은 것들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고 평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한 남자의 그림자로 살면서 떨쳐버리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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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욕망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상처가 됐다. 모든 것을 녹이고 버리게 한 육체적 욕망은 마흔을 넘기며 사라져 갔다. 남편의 부족한 문학재능을 채워주면서 그의 성공에 만족해온 은밀한 공감과 타협도 자기 기만의 상처가 되었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의 세상에 맞서지 못하고 남편을 이용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그 사실을 자식들에게까지 숨기고 살아야 할 만큼 남편이 가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아내에게 고맙다”, “그녀는 진정 저보다 나은 반려자입니다”, “이 여인 없이는 전 아무것도 아니다”는 남편의 말이 진심이 아닌 모욕처럼 들렸다. 더 이상 내조하느라 오래 고생한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삶인들 다르랴. 반세기를 살아온 부부에게 그만한 사연과 상처와 갈등이 없으랴. 조와 조안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더 와이프』는 그들에게 문학적 욕망과 심리를 섬세하게 입혀 색깔과 깊이와 감성을 더했다. 그 속에는 인간의 비열함과 위선에 대한 조롱도 있고, 현모양처의 아름다움과 따뜻함도 있고, 재치 있는 생활 감각과 유머도 있고, 날카로운 문학세계에 대한 비판도 있으며, 애잔한 삶의 상처들도 있고, 비장하지만 시원한 반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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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와이프』는 여러 갈래로 읽힌다. 독자에 따라 결말에 대한 제 각각의 상상과 기대도 갖게 한다. 누구에게는 페미니즘으로, 누구에게는 조의 죽음이 가져다 준 씁쓸한 연민과 허무로, 누구에게는 인간의 위선에 대한 고발로. 그래서 누구는 조안이 “인생에서는 당신의 노력을 인정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조의 말에 따라 그냥 진실을 묻어버리고 지금 이대로 살기를, 누구는 조안이 “이 짓은 더 이상 안 할래”라고 말한 대로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더 와이프』의 속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관계와 욕망, 그리고 분노와 회한이다. 관계는 이율배반적이고, 욕망은 이기적이며, 분노는 은근하며, 회환은 깊고 쓸쓸하다. 조안은 조의 아내이면서 “난 헬싱키상도 탔어”라고 큰소리치는 사실상 조의 작품의 진짜 작가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에게는 작가일망정 결코 세상의 작가일 수 없다. 조안이 작품을 쓰는 동안은 조가 아내 역할을 하고, 조가 “진정한 작가는 아내”라고 치켜세우지만, 언제나 그녀는 세계적 명성의 작가 남편을 빈틈없이 보살피는 아내이다. 그렇게 행동한다.

그녀가 반세기 가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자신의 육체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남편의 무분별한 불륜이 계속되면서 그 욕망은 분노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불공정한 거래를 덥석 잡았다. “난 내 작품을 쓰고, 내 시간을 가지고 잠시 기다리고, 세상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어”라고 예순네 살이 되어서야 깨닫고 후회한다. 이제 ‘이걸로 충분하다. 이제 나를 가게 해 달라. 다음 10년 동안에는 매일 아침 당신의 만족스러워하는 얼굴 옆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해 달란 말이야.’ 거짓된 삶을 통째로 버리려는 조안의 선택이 통쾌하면서도 애잔한 것은 시간이다. 그렇게 살아버린 세월과 그녀가 말한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10년’이 너무나 길고 짧다. 뒤늦게 그런 선택을 했음에도 진실을 파헤치려는 전기 작가에게는 “조는 훌륭한 작가였어요. 그리고 난 언제까지나 그가 그리울 거예요”라고 거짓말을 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밉지 않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비욘 룬게 감독은 영화 <더 와이프>에서 현실성과 흥미를 높이기 위해 헬싱키문학상을 노벨상으로 바꾸고, 아들 역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신인 작가로 설정해 또 다른 상처와 갈등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소설의 다양한 감정과 시선, 명징한 문장들로 담아낸 조안의 과거와 현재의 내면 심리를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때문에 유명한 작가 남편과 그의 아내이고, 엄청난 진실을 감춘 특별한 부부이고, 그 진실을 자식들에게만은 말해줄 것 같은 암시를 하지만 결국에는 평범하고 단순한 황혼이혼 이야기에 머물고 말았다.

영화 더 와이프

영화가 소설의 상상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다. 하나를 선택한다. 우리에게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영화 <더 와이프>의 선택은 어느 부부의 숨은, 흥미로운 진실이다. 그래서 소설보다 단조롭다. 다만 이제는 조안보다 나이를 더 먹은, 한때 할리우드의 팔색조 마녀였던 글렌 클로즈(72)의 연기만은 영화가 가진 탁월한 매력이다. 때론 무심한 듯, 때론 인내하듯, 때론 폭발하듯 자신의 내면을 표정 하나로 깊고 넓게 드러내는 그녀를 어떤 작가도 글로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골든글로브가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것이 당연하다. <더 와이프>가 가진 진실을, 누가 진짜 작가인지 알고 조가 아닌 조안에게 대신 상을 준 것은 아닐까.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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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7-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