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위의 패스포트

아바나, 카리브해의 뜨거움 속으로!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1

2016년 가을과 겨울. 쿠바에서 보낸 3개월은 내겐 카오스였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순수와 오염. 자유와 고독. 혼돈과 모순. 환상과 환멸. 매혹과 잔혹.
그 시간을 통과해 낸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진 속에 채집된 생생한 원색의 이미지들 이면에 깃든 슬픔과 연민이 서서히 내 마음을 휘젓는다. 화장한 얼굴과 민낯이 너무 다른, 겉과 속이 딴판인 연인과 지독한 연애에 빠졌다 나온 느낌이다.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연인. 쿠바 연인을 그린 레온 이차소 감독의 영화 >비터 슈가<의 제목처럼, 이 설탕의 나라는 달콤 쌉싸름하다.
아바나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에 도심에서 닭 우는소리에 잠이 깼다. 같은 시간에 망치와 드릴 소리도 들려왔다. 아바나는 밤낮으로 공사 중이었다.
도시는 폐허가 된 건물들과 화사한 페인트로 외관을 칠한 건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느낌은, 마치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았다. 뜨거운 열대의 태양이 그 위로 조명처럼 쏟아졌다. 적나라한 색감에, 열기에, 나는 현기증으로 자주 걸음을 멈추곤 했다. 50년대에 생산된 화려한 색의 올드 카들이 내뿜는 지독한 매연 때문이었는지도. 그러나 매연보다 더 숨 막혔던 건, 서울에서는 24시간 공기처럼 느껴졌던 와이파이가 차단된 세계에서 지내는 거였다. 땡볕에 두어 시간 줄서서 비싼 인터넷 카드를 사야만 했고, 국가에서 정한 무료 와이파이 구역인 공원에서 인터넷을 해야 했다. 노천 공원에서 인터넷하다 갑자기 쏟아진 열대성 폭우에 물벼락을 맞는 황당함이란. 일기예보에 인터넷지수가 필요한 나라다. 외국인 여행자들은 큰 호텔의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접속할 수 있다고 했다. 숙소 근처인 아바나 리브레 호텔에서 식사와 커피, 인터넷을 이용했다.
그런데 1주일 정도 머문 첫 숙소에 문제가 있어 두 번째 숙소를 구해야 했다. 나는 지인에게 조용히 혼자 집필할 수 있는 작은 아파트를 구해주기를 부탁했다. 그 공백기에 쿠바의 지방 여행을 몰아서 하기로 했다. 쿠바는 인터넷 기반의 개인여행 인프라가 없다. 여행사가 국영여행사다. 배낭여행객들은 국가가 허가하는 민박인 까사를 알음알음 알아볼 수도 있다지만, 불안하고 겁이 많은 나는 여행사를 찾아갔다. 국가의 주 수입원인 외국여행자에게 도시마다 특급호텔의 바우처를 팔고, 관광 예약을 해주고 카드 아닌 현금으로만 결제했다.
외국인 전용 고속버스인 비아술 버스를 탔다. 사탕수수 밭이 이어지는 시골 국도 같은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 끝의 산티아고데쿠바까지 15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화장실에 정차할 때마다 현지인들이 행상들에게서 주전부리를 샀다. 땅콩강정과 깨강정 비슷한 특산물인데, 사고 싶어도 내겐 현지인 화폐가 없었다. 물끄러미 서있는데, 내 옆 좌석에 앉았던 쿠바 남자가 땅콩강정을 사서 내게 건넸다. 내가 차 안에서 외국인 화폐인 1CUC(쿡 또는 세우세)을 주려 하자 너무 많다며 극구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작은 돈이 아닐 텐데, 그 나누는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밤새도록 달리는 고속도로의 하늘에서 쏟아질 듯 총총한 뭇별들이 반짝이며 따라왔다.

5성급 호텔은 시설이나 서비스도 좋았고 가격도 비쌌다. 쿠바는 이중화폐를 쓴다. 외국인 화폐 1쿡은 달러와 환율이 같으며, 내국인 화폐 1CUP(모네다 나시오날 또는 세우페)의 25배의 가치가 있다. 호텔비야 자본주의 세계와 비슷하지만, 쿠바에서 제일 비싸게 느껴지는 건 택시비였다. 노란색 택시는 10분 정도 거리에 10쿡 정도이니 한국보다 택시비가 더 비쌌다. 의사 등 전문직 월급이 4만~5만 원이니, 누구든 꿈의 직업인 택시 드라이버가 되고 싶어 한다.
산티아고데쿠바의 중심지에서 아름다운 대성당의 천사상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을 때, 물라토 현지인이 나를 반갑게 아는 척했다. 내가 머무는 호텔의 수영장에 근무하는 호르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전형적인 쿠바 젊은이의 얼굴인 그가 흰 치아를 빛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지도를 펼쳐 친절하고 유창한 영어로 구경할 곳을 설명했다. 마침 자기 집이 그런 관광지 근처고, 퇴근길이니 안내도 해줄 겸 같이 걷겠다 한다. 그는 열아홉 살에 결혼했다며, 수첩에서 아내와 두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달 월급 45쿡을 버는 호텔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벨라스케스 발코니와 파드레 피코 계단, 지하혁명 박물관, 젊은 피델이 살았던 집 등을 안내해주었다. 언덕배기 달동네로 더 올라가니 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곳이 나왔다. 그가 어떤 식당으로 데려가더니, 여기서 아주 좋은 럼과 시가를 싸게 판다며 주인을 불렀다. 손님 없는 식당에서 25쿡을 부르는 산티아고데쿠바 럼주를 15쿡에 한 병 샀다. 끝내 시가는 안 샀더니,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곧 저녁 해가 지니, 그의 초콜릿 빛 얼굴은 어둠에 스며들어 표정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30여 분을 다시 걸어 내려와 광장의 불빛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5쿡 지폐를 꺼내 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돈을 접수했다. 한 달 수입이 45쿡이라는 그가 보이는 태도에 화는 났지만, 이 얼마나 감사한가. 5쿡이 아니었으면 관광지 뒤편의 달동네를 어떻게 구경하겠나. 그것도 무사히!
가난한 쿠바에서는 관광객이 왕이고 봉이다. 특히 동양 여자는 밥이란다. 일종의 여행세라 보면 된다. 수없이 “린다!”를 찾으며 다가오는 남자들.
린다가 도대체 누구야? 린다는 여자 이름이 아니라 예쁘다는 형용사며 작업 멘트다. 결국은 기승전돈이다. 가끔 나는 사람들이 헷갈렸다.
너무도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의심하는 내 마음과 미안한 내 마음은 경계태세와 무장해제 사이를 오갔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2

지방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두 번째 숙소로 아바나 구도심에서 떨어진, 신도심 베다도에 있는 아파트를 얻었다. 말레콩이 3분 거리에 있는 주택가였다.
아파트는 넓었지만, 오래되었고 가구나 시설은 형편없었다. 홀로 조용히, 현지인처럼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에만 만족했다. 나는 해외에 체류하면 밖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기보다는, 식재료를 사서 직접 주방에서 요리를 해서 먹는 걸 좋아한다. 각종 장류와 양념도 챙겨가는 편이다. ‘쿠바인에겐 혀가 없다’는 농담처럼 식당 음식은 너무 짰고 맛도 별로였다. 쿠바는 유기농의 천국이고, 열대과일이 풍부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바나의 슈퍼에서는 고기도 생선도 야채도 과일도 구할 수 없었다. 몇 가지 공산품만, 그마저도 며칠 못 가서 동이 나버렸다. 보일 때 사놓아야 했다. 휴지를 2주 이상 구하지 못해 한동안 10센티씩만 끊어 썼다. 생수나 쌀이 없는 적도 많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커피가 떨어졌는데, 보름 동안 커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야채나 과일을 파는 장마당엔 몇 가지의 제철 농작물만 파는데, 그마저도 일찍 나가봐야 했다. 채소도 운송과정이 좋지 않아 다 시들고 온전하지 않다. 그 무렵은 쿠바의 겨울이어선지 양파나 감자도 구하기 힘들었다. 먹을 것을 구하려고 열대의 태양 속을 진군해 오랜 시간을 헤매 다니는 건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었다. ‘먹고산다’는 말. 그 날것의 고통과 준엄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가끔 청소해주러 오는 관리인 할머니는, 예를 들면, “나 오늘 당근을 좀 구해야 해”라고 말하곤 했다. 맞다! 이곳에선 물건을 ‘산다(comprar)’라는 동사 대신 ‘구하다(buscar)’라는 동사를 쓴다. 나는 그들보다 현금이 많이 있는데, 돈이 있어도 원하는 것을 살 수 없는 이상한 나라에 와 있구나. 돈이면 다 되던 세상에서 온 나는 처음엔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점점 먹는 것도 귀찮고 나가는 것도 귀찮아 자주 끼니를 거르게 되었다. 빈혈이 생겼는지 어지러웠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달걀을 구하고 싶었다. 한 달 동안 헤매도 어디에도 달걀을 파는 곳이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달걀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 뒤를 쫓아가니 사람들이 줄서서 어떤 남자에게 달걀을 받고 있었다. 내가 10쿡짜리 지폐를 꺼내며, 당당하게 달걀 한 판을 달라고 하자 그는 나한테는 줄 수 없다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사정했다. 거절당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배급소였고, 아바나 시민의 배급수첩이 없는 나는 당연히 거절당한 거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지방여행에서는 순수한 관광객으로 호텔에서 왕비처럼 지냈던 초반의 호화생활에서, 가난한 현지인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한 설움이랄까. 특히나 아바나에서 6시간 떨어진 카리브해의 카요 산타 마리아라는 섬에서 2박 3일간 지냈던 올인클루시브 호텔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3

호텔이 독점한 외국인 전용해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바다는 어땠는가. 물빛. 카리브해의 그 물빛은 내가 태어나 여행한 수많은 바다의 물빛 중에 단연 압권이었다. 터키석과 옥과 비취를 섞은 듯한 바다는 보석이었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사와 음료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호텔은 천국이었다.
제1부의 관광 코스를 끝내고 현지인과 호흡하는 생활을 체험하고 싶었던 제2부 코스는 여러 난관에 봉착했다. 왜 난 먹고살기 위해 동네방네 눈에도 잘 띄지도 않는 상점과 장을 이다지도 찾아 헤맬까. 이유를 깨달았다. 현지인들은 웬만한 생필품과 식량은 다 배급을 받고 있었던 거다! 현지인 코스프레만 했지, 생활정보도 얻지 못하고 배급도 못 받는 나는 소외된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정을 눈치 챈 관리인 할머니가 필요한 것을 구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지나 달걀이나 치즈, 햄을 친구로부터 구해왔다고 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물건들을 받고 그녀의 월급만큼 후하게 돈을 주었다. 할머니의 월급은 10쿡. 그래봤자 우리 돈으로 1만2,000원 정도다. 도대체 그 돈으로 어찌 사는 걸까.
곧 짐작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자기의 배급품을 내게 팔았다는 것도. 친구라는 네트워크나 암시장에서는 불법으로 빼돌린 물건들을 다 알음알음 싸게 거래한다는 것도. 주택가 골목에서 뭘 사라고 외치는 그 많은 잡상인들과 자주 현관문을 두들기는 다양한 가방을 든 방문객들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4

어느 날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다 우연히 보았다. 큰 파라솔을 펼친 자동차 뒤로 사람들이 줄서 있었다. 파라솔로 가린 자동차 트렁크 속 아이스박스에서 한 남자가 신선한 돼지고기를 꺼내 팔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 고기는 쿠바에서 처음 구경했다.
그 주택가 동네는 모두 문을 열어놓고 살고 있었는데, 특히 발코니나 베란다엔 집집마다 흔들의자가 하나씩 있었다. 시가를 문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나 원색 여름옷을 입은 부인들이 선연하게 아름다운 핏빛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들만의 유일한 사치이자 여유다. 그러다 커튼도 없는 유리창 안,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동양인 여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걸 나는 알아챘다. 무뚝뚝한 그들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쇠를 방에 두고 나와 집에 들어가지 못하던 나를 모두 나와 도와주던, 뜻밖에도 속 깊은 이웃들이었다.
나 또한 간혹 말레콩으로 걸어가서 카리브해의 석양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하루가 저물 무렵, 연인과 가족이 데이트나 나들이를 와서 잠깐 쉬고 가는 곳. 하룻밤 거래를 위해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수상한 사람들. 잡상인들. 삐끼들. 기둥마다 ‘낚시금지’라 씌어있지만, 생선을 팔아 먹고살기 위해 몰래 긴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들.

아바나, 영혼은 탈탈 털리고 심장은 도취하다-5

이 도시에는 구호가 많다. 구호가 무슨 소용인가. 무엇보다 삶이 먼저지. 혁명과 삶을 간혹 생각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혁명의 이상(理想). 체 게바라와 나의 체류 기간에 죽은 피델. 쿠바 국민시인이자 독립투사인 호세 마르티. 그리고 헤밍웨이. 노예의 후손인 쿠바노의 혈관에 흐르는 열정과 비애. 동네마다 울리는 살사 리듬과 아멜 거리의 격렬한 노예의 춤. 부에노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과 화려한 트로피카나 쇼. 그런 건 여행 책자나 블로그에 잔뜩 나온다. 하지만 초라한 삶이라도 도취해서 사랑해야 살 수 있는 사람들……. 나를 보면 미소 짓던 이웃들. 호세마르티문화원에서 만난 한국어를 공부하는 쿠바인들. 쿠바를 탈출하는 게 꿈이라는 스물다섯 살의 스페인어 선생 소피아. 서울에 관해 호기심 많던 옆집 식당의 종업원 에르네스토. 의사지만 비번인 날엔 전기공으로 일하는 후안. 나를 엄마처럼 자주 안아주던 관리인 할머니 미르타. 커피와 계란을 구했던 날의 소소한 기쁨과 행복…….
그 곳의 사람들과 삶의 순간들, 이런 것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바나를 떠나는 마지막 날, 나는 모로 성에 올랐다. 아바나 항구와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그곳에서 이렇듯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에게 안녕과 작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고하는 못된 연인처럼. 떠날 곳이 있는 나는 왠지 아주 미안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아파왔다.
대신 아바나의 눈물과 미소 속에서 내 영혼에 나무 하나가 뿌리내렸다.

넓은 내 심장은 모두 너의 것이니
모든 슬픈 것들을 담을 수 있으리라
세상의 모든 눈물과 고통과 죽음까지도.
(…)
나는 나눌 수 있나니 주변 잔디들이 미풍을 나누듯,
너를 받아들이기 위한 저 흠 없는 새들
도취한 심장을 나는 준비 했으니

ㅡ호세 마르티 「내 영혼의 나무」 중에서

권지예

소설가, 1960년생

장편소설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 『유혹 1~5권』 『4월의 물고기』, 소설집 『퍼즐』 『꽃게무덤』 『폭소』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9-05-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