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히스토리

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4화

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외교독립론과 민족자결주의에 기댄 독립선언서의 몇 장면 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외교독립론과 민족자결주의에 기댄 독립선언서의 몇 장면

1.인류의 보편적 가치 - 인도와 정의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에게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포하리라.
— 「2·8독립선언서」
우리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인류의 양심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고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 오늘 우리의 임무는 다만 자기의 건설이 있을 뿐이오,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옛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미워하고 배척함이 아니로다.
— 「3·1독립선언서」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와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는 모두 인도·정의·자유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에 조선의 독립은 단순히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세계의 평화, 인류의 문화와 자유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등장한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가 인도와 정의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에서 나왔다.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인류의 양심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 변화의 큰 흐름”이 바로 그러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도 국제관계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이상주의적인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사회를 지배한 성리학은 보편주의에 바탕을 둔 사상체계였다. 물론 이때의 보편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설정한 위에서의 보편주의, 즉 중세적 보편주의를 의미한다. 이러한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당연한 질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소개되어 조선 정부와 지식인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예방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켜줄 수 있는 ‘구원의 손길’처럼 여겨진 만국공법(萬國公法) 역시 당시의 국제관계를 지나치게 이상적, 합리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조선의 만국공법에 대한 이해는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이 번역한 국제법 서적들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독교와 서구문화를 중국에 전파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던 마틴은 국제관계의 자연법적, 이상주의적 측면을 부각시켰고, 이는 자연법적인 전통을 지닌 조선에서도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경험한 유길준이 1907년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말을 빌려 ‘공법 천 마디가 대포 한 문보다 못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듯이, 만국공법은 유럽 국가 사이의 이상적인 국제관계를 상정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오히려 제국주의적 팽창을 합리화시키는 구실을 하는 데 불과했다.

2.외교독립론과 비폭력

내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이르게 된 동기는 첫째 조선 민족의 생존권을 확장하는 것, 둘째 일본 정부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정책을 후회하도록 하는 것, 셋째 현재 강화회의에서 세계평화를 역설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민족에 대한 열국의 동정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뜻은 평소부터 갖고 있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자결문제, 즉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평화적인 것과 힘에 의한 것 두 가지의 길이 있었는데, 조선의 현재에 비추어 또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의 현상에 짝지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수행함에 있어 우선 동지를 규합해서 조선 민족의 의사를 발표하고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방법으로서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현재 개최되고 있는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 및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중재를 의뢰하는 요지의 문서를 발송하는 것 등이었다.

— 최린에 대한 검사신문조서

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외교독립론과 민족자결주의에 기댄 독립선언서의 몇 장면-1
일제강점기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측의 중심 인물 - 나무위키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는 ‘민족대표’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있던 최린의 위와 같은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각 지역의 만세시위 주도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3월 26일 평양에서 배포된 유인물에는 3월 28일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확정할 예정이니 이 날을 기해 기념식을 거행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운동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를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대표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들의 지향 역시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여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조선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외교독립론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방식에서도 비폭력·무저항주의에 입각한 평화적 시위와 열강에의 독립청원이 주요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결국 열강 간의 타협과 양보를 전제로 하여 식민지 문제의 점진적, 평화적 해결 방법을 모색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미국의 도움에 상당한 기대를 갖는 사람이 많았다. 미국이 1차 대전을 제국주의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아니라 전제주의 대 민주주의 진영 사이의 대결인 것처럼 분식해 나가는 가운데 대대적인 평화 공세를 펼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연합국의 승리는 곧 세계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미국이 조만간 조선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보낼 것이라든가, 미국은 비인도적인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구제하려 하므로 결국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의 패전은 결정적이며 마침내 일본은 조선을 독립시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 계몽운동의 한계가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지의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을 독립시켜 주리라고 믿으면서도 국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되도록 운동을 크게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시위에 적극적이었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폭력을 동원한 과격한 시위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3·1운동을 탄압하던 일본군의 기록에서도 “시위 주도자들은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의지가 매우 공고하고, 공약3장을 엄수하며, 당당히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죽음도 불사한다고 다짐했다”라고 이들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독립은 틀림없이 성공한다. 2,000만 동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조국과 자손을 위해 붉은 피를 아껴서는 안 된다”라는 결연한 각오를 표명하면서 만세시위를 조직하였다.

3. 민족자결주의의 이상과 현실

식민지의 주권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 주민의 이익과 수립하게 될 정부의 공평한 주장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에서 모든 식민지 요구를 공평하게 조정한다.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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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 위키백과

1914년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 등의 동맹국으로 나뉘어 식민지 등의 이권을 다툰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초기에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1917년에 들어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의 승세가 뚜렷해진 가운데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은 비밀외교의 철폐, 민족자결주의, 국제연맹의 창설을 포함한 14개 항목의 평화교섭 조건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1월 1차 대전이 끝나자 전후 처리를 위해서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각국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는데, 주요한 의제는 앞서 윌슨이 제시한 14개 항목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 바로 제5항, 이른바 민족자결주의였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 없이 선언적 의미만을 지닌 하나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던 민족자결주의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윌슨은 파리강화회의에 임박해서야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로 국한시키는 방침을 정했고,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한 국제연맹 규약에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삭제했다.

그러나 윌슨은 이후에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지렛대로 활용하였다. 윌슨은 우선 민족자결이라는 원칙에 의거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체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열강 간의 국제협약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약소민족의 문제를 점진적,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가면서 미국이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희망 섞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국제정세는 독립에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우선 독립청원의 일차적인 대상이었던 일본은 승전국의 입장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독일의 과거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북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군사적 점령마저 기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팽창정책은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을 때에만 가능했으므로 스스로 조선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미국은 이 시기에 중국 본토와 만주로의 경제적 팽창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혁명노선이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의 창설을 순조롭게 매듭짓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인정했던 한반도 문제를 가지고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의 조선 병합은 1차 대전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인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는 확고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는 조선인의 요구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재미 한인사회의 이승만 등은 1919년 2월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 아래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하여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를 미국 행정부에 청원하였으나 이것 역시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했다.

4. 현실주의, 또는 패배주의

최남선 군처럼 우리가 일본의 통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파리강화회의에 알리는 게 조선 독립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바보들 같으니! 왜? 이유는 이렇다. (1) 계약(합병조약)을 통해서 조선의 악정이 일본의 유능한 행정으로 대체되었다는 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조선의 상황이 종전보다 더 열악해졌다는 걸 파리강화회의에 납득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생사가 걸린 문제인 만큼 다른 열강의 군사력에 제압되지 않는 한 조선이 독립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영국이 하찮은 조선을 독립시킬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할까?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3) 역사상 투쟁하지 않고서 정치적 독립에 성공한 민족이나 국가는 하나도 없다. 싸울 수 없다면, 독립을 외쳐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1919년 1월 29일 「윤치호 일기」
당시 국제정세에 밝았던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국에 있던 안창호는 1차 대전 직후 미국 한인사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 승인을 요구하자든가,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한다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는 데 대하여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한갓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나 발표하여 무슨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면 이는 어리석은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국내에 있던 당시의 대표적인 개화지식인 윤치호는 유럽여행 가라는 최남선의 권유가 있던 다음 날 일기에 위와 같이 썼을 정도이다. 일본 유학생들 역시 민족자결주의가 1차 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일 뿐, 일본을 포함한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가 바로 독립을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민족자결주의가 새로운 보편적 국제질서의 원리로 제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선에서 파견된 대표의 호소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논의해 주기를 바라거나, 최소한 그렇게 조성된 국제적인 정세에 따라서 조선인들의 독립을 위한 호소에 강대국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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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 - 1919. 일제 침략의 실상 전파를 위해 파리위원부 통신국이 간행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열강의 지원을 기대하는 외교독립론에 의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보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신채호 등이 1923년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발표하여 암살·파괴·폭동 등을 독립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주장하는 등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려는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 3·1운동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자 국내에서는 ‘우리가 강해지는 법을 모르는 이상, 약자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윤치호의 인식처럼 독립까지는 기대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지배정책 개선과 참정권 획득에 만족하려는 개량주의적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이광수는 1924년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자는, 즉 자치권이나 참정권 획득에 목표를 두자는 주장을 하면서, 「3·1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최남선은 1930년대에 일본의 신토(神道) 보급에 나서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후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을 포함한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글 / 이윤상_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19oo년생

논문 /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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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