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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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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독립선언서」, 여성 배제의 정치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최팔용과 윤창석이 사회로 나섰고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최팔용 서춘 김도연 백관수 송계백 김상덕 최근우 이광수 김철수 윤창석 이종근 등 11명의 이름이 조선청년독립단의 일원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이 소식에 경찰은 즉각 회관을 포위하고 3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학생과 경찰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이 자리에는 도쿄로 유학을 온 여학생들도 있었다.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장인 김마리아를 비롯해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생인 황에스터 현덕신 유영준 등이 참석했다.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조선인유학생학우회와 별도로 도쿄에 유학하고 있는 여학생들이 만든 친목단체였다. 회장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여자학원을 다니던 김필례가 맡았다. 1916년 봄 김필례가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에는 김마리아가 임시회장이 되었다. 김마리아 역시 정신여학교 졸업생으로 모교 교사를 역임하다 1915년에 도쿄여자학원에 입학했다. 김필례는 김마리아의 고모이기도 했다.

기획특집 독립선언서 막전막후 독립선언서 작성 과정-1
독립운동가 활동 당시의 김마리아와 결혼 직후의 나혜석 - 나무위키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7년 10월 17일 임시총회를 열어 회장에 김마리아, 총무에 도쿄여자미술학교생인 나혜석을 선출했다. 김마리아는 도쿄에 친목회 본부를 두고 일본 각지에 지회를 설치했다. 기관지로 ≪여자계≫도 발간했다. 황에스터, 나혜석, 그리고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생인 허영숙이 편집을 맡았다. 발간비용은 회원과 후원자가 자발적으로 낸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남자 유학생들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이광수와 전영택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처럼 김마리아가 이끄는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친목 도모를 넘어 여성계몽운동에 적극 나서며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919년은 흥분과 기대 속에 시작되었다. 민족자결주의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파리강화회의가 곧 개막될 예정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자리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에 발맞춰 일본 유학생들은 민족의 독립 의사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월 6일 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연사로 나온 학생들은 지금이야말로 독립운동이 필요한 시기이고 해외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으니, 유학생들도 동참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바로 이 자리에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장인 김마리아와 황에스터, 현덕신을 포함해 여섯 명의 여학생이 동석했다. 그녀들은 독립운동을 하자는 주장에 동조하며 30원을 운동자금으로 쾌척했다.

이날 쟁점은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참석자들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임시실행위원을 선출했다. 그런데 남자 유학생들은 여자 유학생들을 논의에 끼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황에스터가 일어나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서 달리지 못합니다”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임시실행위원 11명 모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남자 유학생으로 구성되었다. 다음날인 1월 7일 임시실행위원들은 자신들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식을 준비했다.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작성했다. 이처럼 3·1운동 발발에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던 2·8독립선언은 여성 참여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2.독립선언서 배포에 나선 여성들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에서 배제되었지만, 독립운동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2월 8일 그녀는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운동자금으로 30원을 지원한 게 발각되어 도쿄 경시청에 연행되었다가 당일로 석방되었다. 김마리아는 곧바로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고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 여성 복장을 하고 「2·8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2월 17일 고국 땅을 밟았다. 부산에서 대구로 다시 광주에 들러 「2·8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인쇄했다. 2월 21일 서울에 들어온 김마리아는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신준려 등을 만나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렸다. 이후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다음날인 2일 상경했다. 곧바로 국내로 들어온 황에스터, 나혜석, 그리고 박인덕 등과 만나 여학생의 만세시위 참여를 준비했다. 마침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학생 주도의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날 밤 경찰은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김마리아는 다음날 단속에 나선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유학생인 김마리아가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역할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학생들이 「3·1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시위 확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는 최남선이 기초한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배포되었다.
「3·1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공장 감독 김홍규는 그날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3·1독립선언서」 2만1,000매를 인쇄했다.
다음날 천도교월보사 사장인 이종일의 책임 아래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배포되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 지도자였던 이갑성은 보성법률상업학교생인 강기덕에게 1,500매를 보내 학생들이 서울에 배포하도록 요청했다. 2월 28일 밤 승동교회에는 10여 명의 중등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나눠가졌다. 민족대표이자 불교 지도자였던 한용운은 중앙학림 학생 오택언, 정병헌 등 9명에게 1,500매를 건네 서울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서울에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은 모두 학생들에게 맡겨졌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학생 주도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여학생들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확산하는 일에 앞장섰다.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유관순은 당시 충청남도 천안에서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3월 1일과 5일 서울 시위에 참여하고 임시휴교령이 내리자 독립선언서를 들고 3월 13일에 귀향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4월 1일에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3,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2월 28일 전국에 배포된 「3·1독립선언서」는 그날로 개성에 도착했다.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은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목사였다. 그는 개성에 사는 강조원 목사에게 독립선언서 200매를 보냈다. 그날 밤 개성 남부교회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지 않고 호수돈여학교 서기인 신공량을 통해 북부교회에 숨겼다. 하지만,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는 이 사실을 알고 여전도사인 어윤희와 함께 「3·1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아 3월 1일에 개성 시내에 배포했다.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호수돈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미리흠여학교 학생과 호수돈여학교 부속 보통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호수돈여학교 기도실에 이호진이경지 이경채 유정희 김신도 조화벽 김낸시 이봉근 조숙경 김신렬 최옥순 등 호수돈여학교 학생들, 이신애 이영숙 등 미리흠여학교 학생들, 부속학교의 교사 권영범과 학생 이경혜 김정임 유순덕 등이 모여 만세시위를 모의했다. 이튿날인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은 기도회를 마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 행진에 나섰다. 어윤희가 연설을 시작하자 여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미리흠여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은 물론 군중이 가세하면서 만세시위는 밤 12시까지 이어졌다.

호수돈여학교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 학생 중 조화벽은 강원도 양양 출신이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임시휴교령을 내리자 3월 말에 독립선언서를 들고 고향으로 달려가 양양감리교회 청년 지도자인 김필선에 전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그리고 4월 4일 양양 장날에는 마을 간의 연대 시위가 일어났다. 1925년에 조화벽은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과 결혼했다. 유관순과 조화벽은 생전에 만난 적이 없는 올케와 시누이 사이지만, 둘 다 3·1운동 당시 여학생으로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시위를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3. 여성의 주권 선언, 「대한독립여자선언서」

3·1운동 당시 「3·1독립선언서」를 비롯해 국내외 곳곳에서 독립선언서들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남녀평등 문제를 언급한 경우는 「대한독립선언서」가 사실상 유일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1일 중국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를 기초한 사람은 조소앙이었다. 여기서는 “남녀빈부를 제(齊)하며”라고 하여 남녀가 평등하고 빈부차가 없는 나라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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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여자선언서 - 1919년 간도의 애국부인회에서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 독립기념관 제공

1919년 4월 8일 중국 간도 지역에 연해주로부터 보낸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000여 장이 배포되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본문 33행 총 1,291자로 된 순한글선언서였다. 이후 선언서 전문이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발간하던 《신한민보》 1919년 5월 8일자에 실렸지만, 한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1985년 안창호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문서들을 기증했는데 그 안에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이 발견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말미에는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으로 서명자 명단이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과 연해주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부인회를 결성하고 대표자 8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선언서는 간도만이 아니라 국내와 도쿄 등에도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반만년의 역사와 2,000만 민족을 가져 충분히 자존할 수 있는 우리나라를 일본이 침략적 야심으로 세계의 공법과 공리를 무시하고 형식에 불과한 합방을 성립시켰다고 비판했다. 둘째,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나라가 ‘민본적 주의’로 평화를 주창하는 때를 맞이해 남자사회에서는 곳곳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하고 있으니 모쪼록 성공하기를 혈성으로 기도하며 우리도 비록 아녀자들이나 국민으로서 양심은 한 가지이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셋째, 아들 5명이 전사했으나 전쟁 승리에 기뻐했다는 스파르타의 사리, 가리발디의 부인으로서 전사한 이탈리아의 메리야, 임진왜란 당시 진주에서 일본 장수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와 평양에서 일본 장수를 죽인 화월 등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를 구하기 위해 활약한 각국 여성의 사례를 들어 이들을 본받아 여성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는 동포들에게 ‘살아서 독립깃발 아래 활발한 신국민’이 되기 위해 분발할 것을 호소했다.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
이처럼,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도 주권을 가진 국민임을 선언하고 나아가 국민으로서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미국에서는 1919년 8월 5일 여성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독립운동 관련 행사를 할 때마다 「3·1독립선언서」와 함께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낭독했다.

3·1운동 당시 많은 독립선언서들이 발표되었다. 여성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하며 스스로 주권자임을 선언했다.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남녀평등과 함께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3·1운동에서의 여성들의 활약과 함께 여성도 주권자라는 제도적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여성과 여성운동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역시 크게 달라졌다. 여성계몽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는 여성운동가들이 주목을 받았다.

글 / 김정인_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1966년생

논문 /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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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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