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전라도 남원 용천뱅이 사건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 리더는 통通 한다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 리더는 통通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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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899년 전라남도 남원. 조선 조정에서 남원군수에게 훈령을 내려보냈다.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 어린아이가 용천뱅이('문둥이'의 방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군수는 비밀리에 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여 상세히 보고하라.'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1

훈령을 받은 남원군수는 관리들을 불러모았다.

“근래 어린아이가 죽은 사건이 있었느냐?"

"관아에 보고된 것은 없으나,
작년에 김판술이라는 자가 자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해 복수를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2
곧 김판술은 관아에 불려왔고, 군수는 심문을 시작했다.

"지난해 아들을 잃었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인가?"
"사또, 제 아들은 고작 여섯 살의 나이로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김판술은 훌쩍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건 당일, 김판술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찾아 동네 밖으로 나섰다.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3

"어르신, 왜춘이 못 보았소? 아까 어르신 손자와 함께 논다고 나갔는데요."
"아까 손자 녀석이 돌아와서는 삽을 든 아저씨가 왜춘이에게 사탕을 주며 데려갔다 했소."

김판술은 아들이 놀았다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웃 마을에 사는 이여광이 삽으로 밭을 갈고 있었다.

"여보게, 우리 아들 왜춘이 못 봤소?"
"종일 밭을 가느라 못 봤습니다."

이여광이 급하게 자리를 뜨자, 함께 따라온 왜춘의 친구가 김판술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 사람이 아까 왜춘이를 데려갔어요."

김판술은 이여광이 왜춘이를 데리고 갔다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발자국을 쫓아 산 뒤편에 도착하자 배가 갈린 채 처참하게 죽어 있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4

"이여광 이놈이 나병 때문에... 내 이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당시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여광의 집 안에 나병환자가 많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때문에 김판술은 이여광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군수는 김판술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여광을 어찌한 것이냐?"
"그놈의 집으로 찾아가 결박하고 다그쳤습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발뺌하더니, 계속 추궁하자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랬다고 자백을 했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죽인 놈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5

김판술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이여광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1년 이상 지나 시체 검시는 불가능했다. 군수는 김판술의 진술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여광의 형을 불렀다.

"이여광이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김판술의 아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냐?"

"사실 여광이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아래 두 동생이 몹쓸 병에 걸렸지요. 여광이는 그날 간을 봉지에 담아와서는 동생들에게 주라 했습니다. 허나 여광이가 그렇게 죽고 나서, 동생 중 한 놈은 죄책감에 목을 매어 죽고, 다른 한 놈은 충격으로 병이 악화되어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 한 집안에 셋이나 죽었는데도 왜 관아에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

"알려져 봐야 좋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당장 일손도 부족한데요."

고전의 지혜 : 조선탐정실록(용천뱅이 사건)-6

나병으로 인한 살인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 동네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읍호가 강등되는 손해를 보기도 했다. 또한 백성들이 심문을 받다가 한해 농사를 망치거나,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여광의 가족은 김판술에게 화해를 청했고, 동네사람들의 묵인 아래 살인사건을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전국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에 살인으로 원수를 갚은 경우, 장 60대에 처했을 정도로, 사정을 헤아려 판결을 내렸다. 김판술 역시 살인죄로 감옥에 갇혔으나, 참형을 면하고 수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토막지식

오늘날 한센병으로 불리는 나병은 조선시대 때 나풍, 대풍창, 용병, 용천뱅이라 불렸다. 19세기의 조선의서 <의휘>에 따르면 나병을 낫기 위해선 술과 여색을 멀리하며 맑고 고요하게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방탕한 생활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낭설로 인해, 나병환자들은 병에 대한 고통뿐 아니라 끔찍한 편견 또한 견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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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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