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조선시대 억울하게 죽은 어린 며느리의 '죄를 묻다'

고전의 지혜 : 평산 박소사 살인사건 고전의 지혜 : 평산 박소사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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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786년, 도성 밖에 행차 중이던 정조 앞에 한 남자가 길을 막아 섰다.
전하, 제 누이가 죽임을 당했는데 자살이라는 판결이 내려져 너무 억울하옵니다. 부디 범인을 잡아 누이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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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남자의 간절한 호소를 지나치지 않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말하겠느냐. 해당 법조에 재수사를 지시하도록 하라!"


2년 전, 황해도 평산. 여인 박소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평산부사는 검험관을 소집했다. 조선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고을 수령인 부사가 직접 현장에 나와 사건 경위를 묻고, 오작사령과 함께 시체를 검시하였으며, 서리가 그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여 보고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평산부사가 현장에 도착하자, 죽은 여인의 남편과 시어머니인 최아지가 나와 있었다.

"며느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저리 피투성이가 된 채로…."

평산부사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구박했다는 점과 평소 행실이 문란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평산부사가 오작사령에게 시체의 검시를 지시하자, 오작사령은 시체의 옷을 다 벗기고 깨끗이 닦았다. 목을 맨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물로 목을 축축히 적시고 데친 파의 밑동을 짓찧어 바른 뒤,
그 위에 초를 적신 종이를 덮었다.

"종이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목을 맨 것이 사인은 아닙니다.
칼에 찔린 상처를 살펴보니 총 세 곳인데, 후골 위 두 곳의 상처는 깊지 않고 식도와 기도의 상처가 길고 깊은 걸로 보아 이 상처가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입니다."

평산부사는 상처의 깊이와 모양이 다른 것을 들어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 정조는 박소사 사건의 재조사를 위해 은밀히 암행어사를 황해도 평산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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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우선 시체 검사 결과를 다시 살펴봤다.

" <무원록>을 살펴보면 자살의 경우 목구멍 아래 스스로 다친 칼자국은 하나이고,
자신을 찌른 뒤 다시 찌르는 것은 어렵다고 되어 있다.
아무리 자살을 마음 먹었다 해도 어린 처자가 스스로 여러 번 찌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야."

암행어사는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평민으로 위장하고 주변사람들을 탐색했다. 그 결과, 최아지의 집에 외간남자가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암행어사는 최아지의 집 근처에서 잠복을 시작했고, 며칠 되지 않아 늦은 밤 집에서 나오는 남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조사 결과, 그는 놀랍게도 최아지의 조카였다. 그는 최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박소사가 죽었던 날의 행적 또한 묘연했다. 암행어사가 최아지의 조카를 강하게 압박하자, 곧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최아지가 자기 며느리가 우리 관계를 눈치 챈 것 같다면서, 박소사의 입을 막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해서 그만."

이로써 박소사의 죽음은 사건 발생 2년여 만에 타살로 최종 판결되었다. 드러난 진실은 더욱 참혹했다. 최아지와 조카 사이에 임신한 아이를 몰래 매장한 사실까지 추가로 밝혀졌던 것이다. 최아지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지만 참형에 처해졌고, 조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친상간을 금기시했고, 사실이 드러날 경우 엄한 처벌을 받았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힘든 조선시대였지만, 혈족들은 그나마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기에 오히려 금기시된 욕망이 분출되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망으로 인해 어린 여인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토막지식

<무원록>은 본래 중국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법의학서로 송나라 때 형사사건 지침서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세종대왕의 지시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한 <신주무원록>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조선에서는 이 책을 기초로 수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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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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