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후쯤에도 남편은 한 번 더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있다. 남편과 함께 회사 송년회에 다녀온 다음 날의 일이다. 송년회는 연례행사였다. 나는 그 모임에 가기 위해 며칠 전부터 입고 갈 옷을 정하고, 손톱을 정리하고, 미용실에도 다녀온다. 남편의 회사는 그 바닥에서 꽤 알아주는 편이었고, 직원 처우가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연말이 되면 회사는 시내에 있는 연회장을 빌려서 직원들을 위한 연말 파티를 열어주었다. 훌륭한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고, 연회장 앞쪽의 무대에서는 4중창단이나 현악단, 소프라노 가수들이 나와서 차례로 공연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하얀색 테이블보가 깔린 원형 식탁에 앉아서 공연을 즐겼다. 6인용의 원형 식탁 위에는 사람들의 이름표가 놓여 있다.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로 음식과 술을 가져다가 먹었다.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까지 화려한 파티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거기에 있는 그 모든 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기본적으로 직원들을 위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 회사 소속 연예인이 나타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참여하는 연예인도 있었다. 아니다. 사실, 그랬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윤이소. 그녀는 유명한 영화배우였다. 나는 4년 전에 처음으로 남편을 따라—그때는 남편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있었다— 그 송년회에 갔었고, 그리고 거기에서 윤이소를 실제로 보았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시점에 그녀의 커리어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너무 작고, 지나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나를 만나기도 전에 그녀의 일을 봐준 적이 있다고 했다. 1년 정도. 그는 윤이소가 공주님처럼 자라서 세상 물정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남편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남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의 뒤치다꺼리나 하는—일을 하지 않는다. 내가 윤이소를 처음 봤던 날, 윤이소는 몸에 딱 달라붙는 스퀘어 넥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녀가 결혼을 앞둔 신부라고 착각했을 거다. 우리 테이블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터줏대감이죠. 항상 나타나거든요.”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을 보고 살짝 웃었다. 2년 후엔가, 누군가가 그녀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다.
“난봉꾼.”
나는 그게 너무 무례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그때는 웃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녀의 커리어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확하게 하향 선을 그렸다. 더 이상 영화에는 출연하지 못했고 작년부터 「또 다른 여자」라는 일일 연속극에 조연으로 출연 중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매년 혼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차림으로 송년회에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그녀의 매니저와 매니저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8인석이었지만, 그 테이블에는 언제나 그렇게 세 개의 이름표만 놓여 있었다. 그들 셋은 송년회가 끝날 때까지 머무는 경우는 없었고, 언제나 중간에 다 함께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들이 마치 가족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송년회 때에는 윤이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윤이소의 매니저와 매니저의 아내는 나타났다. 그들의 이름표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서 6인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들 부부는 마치 자신들이 평생 동안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듯이 거기에 앉아서 공연을 보고 음식을 먹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내 소개를 한 후 인사를 건네고 윤이소가 왜 나타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 두 마음 다 내 자신에게 의아한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신경 쓸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우연히 윤이소 매니저의 아내와 마주쳤을 때, 나는 또다시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고쳐 바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그녀는 취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참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물어보았다.
“윤이소 씨가 안 나타났네요. 올해는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날지 궁금했거든요.”
이 말을 던진 즉시 나는 후회했다. 질문을 입 밖에 내고 보니 그제야 무례하다는 생각이 든 것 이다. 그냥 그녀 앞에서 빨리 사라져버리는 게 상책일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부드럽게 내 팔목을 잡았다. 우리가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이는 이제 이곳에 안 나타날 거예요. 그이는 사라져버렸거든요.”
“사라졌다고요?”
그녀는 왜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 누구시라고요?”
나는 내 자신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다. 그녀는 립스틱을 가방 속에 집어넣은 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당신이 누군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쵸? 중요한 건, 그 여자가 편지 한 장을 남겼다는 사실이죠. 그런데 아무도 나한테 그 편지를 안 보여주는 거 있죠.”
그녀는 비참하다는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약간 비틀거렸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부축해서 그녀의 자리로 데려다주었다.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했다.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은퇴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건, 더 이상 윤이소가 이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윤이소가 거기, 송년회에 나타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윤이소 매니저의 아내는 은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왜 매니저의 아내에게는 편지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다.
그날 송년회 내내, 내가 윤이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였다. 그날 밤에는 오히려 금방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남편은 옆에 없었다. 내 휴대전화에는 남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급하게 출근할 일이 생겼어. 저녁때 갈게.’ 나는 더 이상 잘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잠을 잤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 침실 밖으로 나왔을 때, 식탁 위에 남편이 스크랩을 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부분 부분이 잘린 신문, 펼쳐진 잡지들. 풀과 가위, 종이 쪼가리. 그는 그런 것 정도는 손수 정리하는 사람인데 아마도 급히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정리한 후, 커피 한 잔을 만들어서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남편의 스크랩북을 펼쳐 보았다. 남편이 그날 아침 정리한 스크랩은 잡지에 실린 ‘얼굴맹’에 대한 긴 글이었다. 나는 그걸 읽은 후에 앞 장으로 돌아가 이전에 봤던 스크랩도 다시 보았다. 식탁 위에는 스크랩북 한두 권 있을 뿐이지만, 그의 서재에는 스무 권도 더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스크랩북을 볼 만큼 다 봤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꼼꼼히 읽었다. 그런 후에는 서재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스크랩북도 다 읽어보았다.
그날 남편은 밤늦게 돌아왔다. 그는 저녁은 이미 먹었다고 말하고, 서재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나는 그가 자신의 스크랩북을 봤냐고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 밤, 남편은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지만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전에 늦잠을 자서 그런지도 몰랐다.
나는 침대 맡에 놓인 작은 독서 등을 켠 후,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남편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남편의 그런 얼굴을 보니까, 나 역시 내가 왜 남편을 깨웠는지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나,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뭐? 누구?”
남편이 내게 물었다. 마치 그때,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윤이소 매니저의 아내가 “그런데, 당신 누구시라고요?”라는 질문을 던질 때 짓던 그런 표정으로. 하지만 나는 남편의 얼굴에 머무르고 있는 독서 등의 희미한 빛줄기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고, 그럴 필요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고.
“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남편은 몸을 일으켜서 나를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여보, 너무 빨리 결정하려고 하지 말고……”
“충분히 오래 생각한 것 같아.”
내 말에 남편은 갑자기 짜증이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직설적인 말투로.
“그건 정말로 바보 같은 생각이야. 장담하는데 당신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나는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남편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독서 등을 꺼줬다. 하지만 내 결정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저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암막 커튼 때문에 방 안에는 빛 한 점이 없었다. 문득, 열한 살 때 내가 살던 그 작은 동네를 떠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난 후였다. 어머니와 나는 둘이서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많은 것들을 그냥 버렸다.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