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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검시하고 사인을 파악하는 이들을 가리켜 오작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시신을 검시하는 것은 물론, 시체를 처리하는 일, 감옥 및 죄수 관리 등의 잡무도 도맡아 했다.
죽은 시신을 직접 만지고 살피는 그들의 일은 누구나 꺼려했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일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시체를 살피고 사인을 조사하다
1904년 경북 문경, 이른 아침 양반 차림의 한 노인이 다급하게 관아를 찾아왔다.
“내 며느리가 죽었소. 동네 상놈한테 겁탈을 당할 뻔 했는데, 수치심에 그만 목을 매고 말았소.” “어허 저런, 여봐라! 검험에 필요한 도서와 도구들을 챙기고 나를 따르거라.”
현장에 도착한 군수와 관리들은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사건 당시 정황을 말해보시오.” “그게 며칠 전 아내가 욕을 볼 뻔해서 그 후로 두문불출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보니 갑자기 사라져서 사랑채를 가보니 저렇게... 흑흑.”
군수는 관리들과 함께 시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부터 검험을 시작하거라.”
관리 중 한 명이 종지에 담긴 말 기름을 찍어 코밑에 바르고 시체를 덮고 있던 거적을 걷어냈다.
“머리는 동남쪽으로 향해있고, 동쪽 문지방에서 3치, 서쪽 벽에서 6자 5치, 남쪽 벽에서 3자 1치가 떨어져 있습니다. 북쪽 벽에는 두 발이 닿아있습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사체를 밖으로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다
시체를 방에서 꺼내어 밝은 마루로 내오자 목에 줄이 감긴 젊은 여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관리는 은으로 만든 뾰족한 도구를 시체의 입안에 넣었다가 꺼냈다.
“음. 색이 변하지 않은 걸 보니 독살은 아닌 듯 하옵니다.”
“그럼 자살이 맞는 것인가?”
“실은 타살일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냐?”
관리는 목에 난 상처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물과 식초를 발라 깨끗이 닦아냈다.
“자살일 경우에는 목에 흉터가 목 앞에서 귀 밑 쪽으로 떨어지는 형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체의 형태는 가로로 길게 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죽은 뒤에 목을 졸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리는 서까래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목을 매달아 자살하면 줄이 흔들리면서 먼지 가득한 서까래 위에 올가미의 흔적이 여러 개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줄 자국이 하나만 나 있으니 누군가 여인을 죽인 뒤 줄을 매달아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죽은 여인의 남편이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제가 그랬사옵니다. 아내는 전부터 사내와 정을 통하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또 그 놈을 만나러 나가는걸 보고 싸우다가 그만. 흑흑”
결국 남편은 살인죄로 끌려갔고, 죽은 아내와 정을 통했던 사내에게도 죄를 물어 수배령이 내려졌다.
누구나 꺼려했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직업, 오작인
사건 현장에서 사인을 파악한 이는 바로 오작인 김일남이었다. 그는 시신을 검시하고 처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검시했는데, 이는 담당 관리와 응참각인이라고 하는 실무자들이 맡았다. 실무자는 의학과 법률을 조언하는 의생과 율생, 심부름을 하는 경인, 기록을 하는 아전, 그리고 시신을 직접 만지고 살피는 오작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오작인은 말단 아전이었지만 사체를 직접 살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관리들은 시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겁을 내고 담장 밖에서 오작인이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경우가 많았다. 오작인은 사인을 밝히는 일 외에도 시체를 처리하는 일, 감옥 및 죄수 관리 등 잡무를 했다. 시신을 만지는 것은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했고 종종 거짓 기록을 하고 뒷돈을 받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천한 일을 한다고 살아 생전 우리를 멀리했다네. 헌데 죽어서는 꼭 우리와 만나야 하는 운명이라니 재미있지 않소?”
시체를 만진다는 이유로 천한 대우를 받았지만 죽은 이의 마지막을 홀로 배웅해 주었던 오작인. 이들은 누구나 꺼려했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 진정한 직업인이었다.
조선의 CSI, 오작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상고(相考)한 일을 아룁니다. 오작 사령 이함득(李咸得)이 차례로 옷을 벗기고 법물(法物)을 시용(試用)하여 방향을 바꾸어가며 깨끗이 씻어서 상세히 검험하니, 신작은 5척(尺) 6촌(寸), 두발의 길이는 1척 2촌, 앞면(仰面)은 전신이 마르고 황색이며 유연하고, 두 눈이 닫혀 있고, 입술이 닫혀 있고....
뒷면(合面)은 머리부터 양 발꿈치까지 마르고 황색이고 유연하며, 입안과 곡도(穀道 대장과 항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은침으로 탐시(探試)해 보니 색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실인(實因 실제 죽은 원인)은 병으로 인한 물고가 확실합니다. - 헌종(憲宗) 11년(1845)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 중에서
조선시대 때 검시과정에서 시신을 직접 만지는 일을 담당했던 오작인은 아전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어떠한가? 범죄의 현장에서 다양한 감식과 조사를 벌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프로파일러들은 그 전문성과 필요성을 인정받은 지 오래다. 사체에 대한 정확한 사인 규명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직업의 사회적 평판과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