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 - 강영숙

 기획특집 날개 그후이야기 02 날개, 이어쓰기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이상의 대표작 <날개 /> 6명의 작가가 모여 다양한 상상력으로 펼쳐 보았습니다. 이상의 소설에서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2화 강영숙 작가 기획특집 날개 그후이야기 02 날개, 이어쓰기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이상의 대표작 <날개 /> 6명의 작가가 모여 다양한 상상력으로 펼쳐 보았습니다. 이상의 소설에서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2화 강영숙 작가

수영은 프로젝트 신청서를 쓰느라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다. 신입직원을 뽑아도 외주 인력을 붙여도 늘 중요한 일들은 수영의 몫이었다.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전문성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수영이 일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3,000만원의 환경 관련 재단의 기금을 받게 되면 1년에 20개 이상의 회의를 치르고 보고서를 쓰고 영수증 처리를 해야 했다. 남의 돈을 받아쓰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도 단체로서는 숨통이 조금 트이는 일이었다. 작년과 달리 어깨 근육이 거의 안 돌아갈 지경으로 뻣뻣해지고 시력은 점점 나빠졌지만 좀처럼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이 대략 끝났다. 수영은 20장 정도 되는 신청서를 프린트 해 꼼꼼히 체크했다. 이제 대표와 프로그램팀 팀장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확인을 받으면 끝이었다. 책상 정리를 하고 개수대에 쌓인 컵을 닦고 퇴근 준비를 한 뒤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모니터 창에 새 이메일 표시가 떴다. 김 이사가 보낸 메일이 먼저 도착했다. 날짜가 2038년이라고 표시된 것 말고는 다른 잘못된 것은 없는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프로젝트 기획안이 참신해서, 선정되기만 하면 참 좋겠다는 칭찬도 함께 적혀 있었다. 차 부장이 우리 단체를 먹여 살린다는 말도 빼지 않았다. 그러나 2038년이라니, 20년 후의 시간이 턱 밑으로 당겨진 것 같아 수영은 몹시 부담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수영의 집은 사직로의 중앙인 누하동에 있다. 수영은 직장도 집도 모두 이 동네에 있어 일을 더 많이 했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주말 근무도 자주 했고, 사무실 빨래며 죽어가는 화분까지 모두 다 수영의 집으로 옮겨졌다. 이사 왔을 때와 달리, 오래된 한옥들이 틈도 없이 늘어선 골목을 비집고 커피숍이나 선물가게가 들어오는 게 신기했다. 동네는 몇 년 전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작고 낡은 한옥들이 붉은색 진흙을 떼어내고 뼈대를 드러냈다. 모던하고 깨끗한 공간으로 거듭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생 큰돈 만져볼 일이 없던 원주민들은 신이 났지만 수영은 집세가 오를까 늘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뭔가 개발된다는 건 정체되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프로젝트 신청이 끝나면 동네에 새로 들어선 카페에 가 책도 읽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사직로에 피었던 벚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기에는 시간이 늦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길에 중국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면서 마트 직원도, 편의점 직원도 중국인 유학생을 채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수영은 노란색 바구니에 만 원에 네 개짜리 수입 맥주를 담고 크래커를 하나 담았다. 컵라면도 살까 고민했지만 급격히 불어난 체중 걱정에 담지 않았다. 편의점 직원이 계산을 하다 말고 무슨 말인가를 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원 플러스 원이라는 뜻이었다. 수영은 다시 진열대 뒤로 돌아가 맛살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듯 컵라면도 하나 넣었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앉아 있었다. “여봐, 나 담배 하나만 줘요.” 노숙자들이 시멘트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 행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수영은 잘못하면 그들의 발끝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집 앞 골목 초입에 생긴 액세서리 가게를 지나 의류 수거함과 쓰레기 분리수거함 앞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우회전을 해 다시 빌라를 지났다. 수영의 집 바로 앞은 홈스테이 하우스였다. 높은 나무 대문 문턱 위로 여행용 트렁크를 들어 올리는 외국 사람들과 가끔 맞닥뜨렸다. 그런데 오늘은 골목이 조용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순간 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 뭔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빠르게 골목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수영은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에 미란이 서 있었다. 막상 얼굴을 보자 너무 오랜만이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웃음이 났다.

미란은 창을 열고 창밖의 인왕산 쪽을 내다봤다. 수영은 마트에서 사온 것들을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전보다 지붕이 더 내려앉은 거 같네.” 미란은 두 다리를 화장대 의자 위에 올리고 바닥에 누우며 말했다. 수영은 정말 지붕이 내려앉았을까, 천장을 올려다봤다. 미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하나와 그 안쪽에 연결된 안쪽 방, 부엌과 거실을 휙휙 소리를 내며 단번에 훑어보았다. “응 다 똑같네.” 미란은 안도하듯 웃었다.

2년 전에도 수영은 이 집에 살았고 그때도 프로젝트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그때 미란은 거의 자기 집처럼 이 집에 와 머물다 가곤 했다. 미란은 자기가 좋아하는 향신료도 사다 놓고 가구 위치까지 마음대로 바꿨다. 그런 건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남자 친구를 데려와 방 안을 소용돌이가 지나간 듯 만들어놓은 일도 있었다. 지금은 별로 화가 나지 않는데 그때는 화가 많이 나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나가달라고 소리쳤다. 2년 전 그 밤 이후가 바로 오늘이었다. 이 동네가 전부 다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난리야 지금. 수영은 칭타오 맥주 캔을 소리 나게 딴 뒤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뭔데?” 미란은 대학도 다녔는데 왠지 늘 세상 돌아가는 데 둔감했다. 하지만 수영은 그런 걸로 미란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런 걸 모른다고 살아가는 데 지장이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아니, 여기 이 동네가 개발되면서 모두 집값이 올라서 정작 세탁소나 작은 수선가게 같은 것들은 다 쫓겨나고 카페나 음식점이 매일매일 하나씩 생겨.” 수영은 말하면서 냉장고 문에 붙은 치킨집 광고지를 찾아 주문 전화를 했다. “여기서 인왕산이 다 보이면 좋을 텐데, 그치?” 미란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잠시 후 깜깜한 대기를 흔드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치킨 배달부가 도착했다. 미란은 느릿느릿 일어나 앉아 은박지를 연 뒤 빠르게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수영은 또 이번엔 얼마나 오래 있다 가려나 약간 걱정스러워져 미란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너 치킨 안 먹니?” 미란은 또 아무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좋았던 적이 거의 없지만 2년 전 수영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말다툼 후 미란이 사라지고, 수영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미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미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주민번호 앞자리 여섯 자리와 전화번호가 다였다. 집 전화번호나 부모님 전화번호는 알 리가 없었다. 수영은 미란의 부모님의 장례식에도 다녀왔지만 돌아가신 분이 어머니였는지 아버지였는지 가끔 헷갈렸고, 조카들이나 오빠, 언니 얘기를 할 때도 누구였는지 늘 까먹곤 했다. 차라리 결혼을 해버리면 편할 것 같은데 미란은 한두 번 결혼 문턱까지 갔다가 포기해버렸다. 수영이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시민운동 단체에 입사해 마흔이 될 때까지 죽어라 일을 해온 것에 비하면 미란은 늘 무직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은 직장도 다녔고 뭔가 일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수영이 보기엔 다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

미란은 테이블 위에 종이도 깔지 않고 닭 뼈를 버렸다. 또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면서 문을 열어두기까지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 겨우 시간을 내 말끔하게 세탁한 이불 위에 닭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그래도 수영은 이번만은 절대로 미란과 다투지 않겠다고 자꾸만 마음을 다졌다.

기획팀 팀장이 전화를 했다. 업무 시간 외에 전화를 하는 건 뭔가 문제가 있을 때였고 수영은 그것이 프로젝트 신청서 때문이 아니기만 바랐다. 역시나 숫자 계산이 또 틀렸다. 수영은 티브이를 보고 있는 미란을 두고 나와 노트북을 켰다. 접수 마감시간이 월요일 오후 다섯 시인 게 다행이었다. 사실 중요한 숫자도 아니었다. 프로젝트의 기대 효과, 프로그램 1회당 동원되는 인원 등을 숫자로 계산한 산술적인 것들이었다. 프로젝트에 선정이 안 되면 단체 활동이 위축될 게 틀림없었다. 최근엔 세 명의 상근 활동가와 두 명의 보조 인력의 급여도 맞추기가 어려웠다. “우리도 여성 쪽을 할 걸 그랬어, 환경 이슈는 주목을 못 받으니까.” 대표가 그런 말을 할 때 수영은 왠지 자신에게 무능하다고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앞집이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되고 나서는 좁은 한옥 골목이 좀 더 환해졌다. 미란은 티브이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뉴스를 보고 있는 듯했다.

수영은 가능하면 미란이 저 뉴스들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등촌동의 한 빌라에 사는 여자가 성폭행을 피하려다가 이웃집 남자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였다.

수영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리며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미란의 옆얼굴을 보았다. 모로 누운 미란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다시 테이블 앞으로 가 앉았다. 갈색 기름이 묻은 닭 포장지를 반으로 접어 비닐봉지에 넣었는데도 기름 냄새가 공중에 떠다녔다.

수영은 20대 내내 악몽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고3 때 네 명이 떠난 기차여행은 수영의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쩌면 뇌 활동이 멈추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미란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은 연락이 끊겨 소식을 모르는 지 오래였고 사실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일을 떠올리면 강한 바람이 부는 어두운 하늘에서 네 명이 어깨를 맞잡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기분이었다.

미란도 수영도 입 밖에 내어 확인한 적은 결코 없던 그날의 일이 미란의 인생을 망쳤다고 수영은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미란이 집에 와 몇 날 며칠을 살고, 돈을 가져가고 옷을 가져가는 걸 참아낼 이유는 없었다. 그때 그 여행을 갔다 온 후로 수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에게 맞았다. 여자애들끼리 여행을 갔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외박을 한 게 더 문제였다. 네 명의 애들이 각자의 부모들에게 말한 숙박 장소는 다른 부모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애들이 말한 네 곳이, 이름이며 시간이 다 달랐다. 기차를 타고 유원지에 도착한 시간 이후로는 모든 것에 관한 정보가 다 달랐다. 여자애들은 죽도록 맞아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다 입을 다물었다. 다들 말을 맞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한 학기가 지나고 졸업을 했지만 졸업식장에서 조차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두 각자 대학으로 가면서 흩어졌기 때문에 굳이 서로의 소식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영은 대전에 있는 지방대학에 다니고 있던 1학년 2학기의 어느 날, 매점 앞에서 차수영을 찾으며 서성거리는 미란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때는 동기와 함께 사는 청주의 하숙방이었다. 그날 미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수영이 입을 막아버렸다.

“너 애들과 한 약속 잊었어? 그 일을 말하면 우린 다 끝장이야.”
사실 수영은 그때 애들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조차도 잊어버렸다.

수영이 취직을 하고 독립한 후로 미란은 더 자주 왔다. 정말 아무 때나 수영의 집에 왔다. 수영이 사다 놓은 음식을 꺼내 먹고, 수영의 옷을 입고, 수영의 일기장이며 물건을 마구 뒤지고, 수영의 돈을 가지고 외출했다. 유원지에서 있었던 그 일이 미란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검은 딱지를 만들어 애를 아예 주저앉아버리게 만들었다고 수영은 믿었다. 미란이 연락을 끊고 사라지면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나면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의 불행을 함께 져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수영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 책임감은 미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영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수영은 그 일 때문에 더 조심조심 살았고 성실하게 일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니라는 듯, 그날 나는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다는 듯 성실하게 살았다.
나쁜 일을 당한 건 미란이고, 저렇게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이 그런 나쁜 일을 당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듯이 속으로
혼자 외치면서,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당한 친구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기획특집 날개 그후이야기 02 날개

꿈같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사무실에 가 빨랫감을 가져오고 냉장고 청소를 했겠지만 오늘은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수영은 미란을 데리고 복희네 밥집으로 갔다. 무조림과 연근, 김치와 마늘종이 앞에 놓였다. 수영은 된장찌개를 미란은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주인집 아줌마가 삶은 감자 두 알을 테이블로 갖다 주었다. 이른 오전 시간인데도 동네 투어객들이 식당 앞 골목을 서성였다. 이 동네는 안 변할 줄 알았는데, 여기도 변했네. 미란이 말했다. 미란의 손등엔 주근깨 같은 검은 점들이 늘어 있었고 인중에도 주름이 잡혀가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미란의 큰 갈색 눈동자는 뭔가 순수함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안에 입고 있는 셔츠는 새것 같았지만 재킷은 2년 전에도 입었던 그 옷이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늘 제자리였다. 수영은 아랫입술 안쪽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이빨로 물었다. “나 취직했어.” 미란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초등학교 애들 배식 담당인데, 수입이 괜찮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가 한 턱 쏠게.” 대답을 하는 대신 수영은 미란을 향해 한 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고 한 뒤, 입술에 묻은 김을 떼 주었다. 미란의 물 잔이 비었다. 수영은 물을 따라주며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우엉차인지 감잎차인지 차 맛이 몹시 비렸다.

수영과 미란은 팔짱을 끼고 누하동을 지나 통인동 쪽으로 걸었다. 늘 둔탁한 소리를 내던 목재소도 리모델링 중이었고 규모가 큰 타이 음식점도 들어서 있었다. 큰길로 나가기 전, 수영은 미란을 모던한 한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 있잖아, 전부터 여기 한번 와보고 싶었어. 여기 와서 책 읽고 싶었어. 오늘 웬일로 사람이 없네.” 수영은 전시 공간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나갈 때마다 들어오고 싶었지만 늘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 뭐 하는 데니?” 미란이 물었다. 기와집의 틀은 그대로인데 안쪽은 전시공간, 바깥쪽에는 긴 티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수영은 해가 드는 쪽을 보며 앉아 있었고 미란은 전시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앉아 턱을 받쳤다. “그 사람이네, 우리 고등학교 때 배운, 그 기둥서방 얘기 쓴 사람, 그 시인 집이었대 여기가.”

시끄러웠다 조용해지길 반복하는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벽에 진열된 책을 꺼내 읽었다. 문이 열리면서 중국어가 들리고 화장품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한순간 수영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미란의 손을 이끌고 좁고 어두운 복도를 올라갔다. 복도 끝에서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밀어 열었다.

테라스를 중심으로 모인 환한 빛 속으로 미란이 먼저 몸을 내밀었다.
시인의 집 마당이 내려다보이고 반대편 쪽으로는 인왕산이 보였다.
미란은 두 팔을 벌린 채 턱을 들고 산을 향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영도 산을 올려다봤다.

미란은 돌아갔다. 일요일 오후에는 숫자 계산이 틀렸다거나 연도가 틀렸다거나 하는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수영은 핸드백 안에서 찢어온 종이를 꺼내 냉장고 문에 붙였다.
시인의 집 벽면에 붙은 책꽂이에서 꺼내 읽은 「날개」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강영숙 작가 사진

〃 작가소개 〃

강영숙 소설가

소설집 『회색문헌』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장편소설 『라이팅 클럽』 『리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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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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