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쉬인사이드

다시 찾아온 메밀의 전성기

디쉬인사이드 : 다시 찾아온 메밀의 전성기. 메밀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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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펼쳐진 메밀꽃밭의 아름다움

디쉬인사이드 : 다시 찾아온 메밀의 전성기. 메밀꽃 필 무렵
산 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명단편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이 구절은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라도 익히 읽고 들어본 대목이다.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 출신이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가운데 ‘시간의 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아름다운 한국의 사계를 보여주는데, 여기에도 꽃이 만개한 평창 메밀밭의 전경이 나온다.

영상기술의 발달과 보급 덕에 현대인들은 TV가 쏟아내는 전 세계의 명승절경을 거실에 앉아서 관람한다. HD를 넘어서 UHD, 4K 등의 이름으로 초고화질의 영상매체가 등장한 요즈음은 그래서 웬만한 풍경이 아니면 감동을 받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이 살아가며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들은 실제로는 기억의 왜곡에 힘입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힘을 발휘하는 게 애니메이션이다. 디즈니의 여러 작품에 나오는 몽환적인 배경화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극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배경화는 상상의 산물이기에 더욱 감동으로 다가와 보는 이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다.

한국에서도 이런 애니메이션이 나왔으면 하고 목말라하던 필자에게 단비와도 같이 다가온 작품이 몇 해 전에 나온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효석이 묘사하고 있는 휘영청 밝은 달빛에 비친 메밀밭의 밤 풍경을 카메라에 사실적으로 담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소금을 뿌린 듯이’ 하얗게 펼쳐져 ‘흐뭇한 달빛’을 반사하는 메밀꽃밭을 가로질러 가는 나귀 탄 장돌뱅이의 모습은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으면 이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전반적인 완성도에서 한계가 보이기는 하였지만 한국같이 열악한 애니메이션 산업환경에서 그런대로 하나의 가능성을 본 것 같아 기뻤다.

순메밀의 진정한 향기와 맛을 만나는 기쁨

그날 저녁은 영화를 함께 본 식구들과 냉면을 먹으러 갔다. 생각 같아선 막국수를 먹고 싶었지만 제대로 하는 집을 부근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인 냉면보다 메밀의 함량이 더 높은 막국수가 요즈음 조금씩 인정을 받고 서울에도 전문점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아 즐겁다. 필자가 막국수의 고향인 강원도 출신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옛날보다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메밀의 진정한 향기와 맛을 모르는 채 ‘쫄깃한 면발의 냉면’ 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

한국의 냉면은 메밀을 주성분으로 한 ‘평양냉면’ 계열과 전분으로 국수를 뽑은 ‘함흥냉면’ 계열로 양분된다. 양념장의 매콤 달콤한 맛으로 비벼 먹는 비빔냉면이 함흥냉면류의 특징인데 국수를 전분으로 만들어서 쫄깃한 식감의 면발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다. 이에 비해 평양냉면은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육수에 말은 메밀국수가 그 매력인데 ‘주성분’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메밀의 함량이 낮은 국수를 쓰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다. 요 몇 년 메밀 함량을 높인 국수를 내는 평양냉면 전문점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산간지역 주민들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준 구황작물, 메밀

한국에서 메밀 이야기를 하려면 강원도에서 시작하는 게 마땅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는 봉평이다. 봉평은 면 단위로 평창군에 속한다. 지금은 봉평 메밀꽃 축제 등으로 유명해졌지만 강원도가 메밀 농사를 지어서 유명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아이러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지대가 높고, 날씨가 냉하고, 토양도 척박하여 다른 작물을 재배하기가 힘들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메밀을 심었다는 이야기다. 단위 면적당 소출량, 생산 칼로리를 계산하면 당연히 벼농사를 짓는 게 가장 바람직할 터인데, 고온다습한 곳이라야 재배가 가능한 게 쌀농사다.

메밀은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잘 자란다. 그리고 생육기간이 짧다. 파종하고 두 달 반이면 수확이 가능하다고 한다. 구황작물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즉, 모자라는 양식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춘궁기나 겨우살이를 넘겨야 하는 산간지방 백성들에게 메밀은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으로 미국에서도 19세기까지만 해도 많이 재배되는 작물이었다고 한다. 추운 지방인 헝가리 폴란드 쪽 이민자들이 재배하였다고 하는데 질소비료가 도입된 후에 거의 옥수수 밀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비료가 있어서 더 영양가가 높은 작물을 심을 수가 있다면 굳이 메밀을 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시에 영양가가 높다는 것은 칼로리가 높다는 것으로, 요즈음의 기준과는 다르다. 요새는 반대로 칼로리는 낮고 필수아미노산, 각종 비타민, 미네랄 등이 많은 걸 우수한 식품으로 친다. 그래서 메밀이 도리어 각광을 받는다. 실제로 메밀에는 비타민 B1이 많아서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각기병을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해 메밀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글루텐 함량이 적은 식품이 각광받는 시대

여기에 하나 덧붙여서 메밀이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밀이나 보리에 비하여 글루텐 성분이 아주 적다는 것이다. 글루텐이란 곡류에 들어있는 글루테닌과 글리아딘이라는 성분이 반죽할 때 결합하여 생성되는 불용성 단백질로 밀가루나 기타 곡물 반죽에 점성을 주는 성분이다. 국수로, 빵으로, 케이크로 변화가 무쌍한 밀가루의 비밀은 바로 이 글루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공 용도에 따라 글루텐의 함량이 다른 밀가루를 사용한다.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등이 그 분류에 해당된다.

‘글루텐 프리’ 붐이 만든 메밀의 전성기

최근 미국의 첨단 문화에서 불기 시작한 ‘글루텐 프리’ 붐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글루텐이 들어간 모든 밀가루 음식을 비만과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의 원흉인 것처럼 단죄를 하는 분위기다. 시대의 아이러니라는 게 바로 여기에도 해당된다. 칼로리가 적어서 쌀이나 밀만큼 우수한 식품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던 메밀이 지금은 바로 그 이유로 훌륭한 식품이 되고 또 글루텐 함량이 적다는 것은 메밀이 새롭게 각광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 이유에서 메밀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밀가루가 차지하여 메밀국수 행세를 해왔다. 첫 번째는 전후 미국의 원조로 값싼 밀가루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메밀과 가격이 역전되어 값이 비싸진 메밀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그것이다. 한때 밀가루에 숯 가루를 넣어서 색깔만 낸, 메밀이 전혀 안 들어간 가짜 냉면을 만들어 팔던 업자가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걸 대도시에 사는 많은 소비자들이 몰랐다는 점이다. 강원도에서 메밀을 듬뿍 넣어 눌러 뽑은 막국수를 먹어 온 사람이라면 그걸 금세 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금 이야기한 글루텐 함량에서 기인한다. 메밀은 글루텐 성분이 아주 적어서 끈기 있는 면발을 뽑아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옆 나라 일본에서는 메밀 8에 밀가루 2의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하기 쉽게 한 니하치(二八)소바라는 게 있다. 순메밀로만 만든 게 쥬와리 소바, 즉 십 할(十割)소바라는 것인데 집집마다 만드는 노하우가 다르다고 한다. 메밀의 전분을 ‘호화’, 그러니까 끈기 있는 풀 성분으로 만들어 내는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도 메밀 함량을 높인 냉면집에서는 뜨거운 물로 반죽을 하는 ‘익반죽’ 방식을 사용하거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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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로 만나보는 당시의 국수 뽑기

여기에 소개하는 그림은 조선말 풍속화 가로 당시의 생활상을 많이 그려 훗날 사료로도 중요한 작품을 남긴 기산(箕山) 김준근의 작품으로 제목은 ‘국수 누르는 모양’이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그 위에 얹은 국수틀에 반죽을 넣고 국수를 뽑아내는 장면이다. 요새 같은 유압식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눌러 뽑는 ‘압출형’ 제면 방식은 힘이 많이 든다. 그래서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국수틀에 장정이 자신의 체중을 실어 뽑았던 것 같다.

얼음 낀 동치미에 말아먹는 겨울철 메밀국수의 감칠맛

필자가 어렸을 때 겨울이면 동네 사람들이 마을에서 공동 관리하는 국수틀을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걸어놓고 모두 모여 야식으로 메밀국수를 눌러먹곤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타이어 갈 때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자키’같이 한쪽으로만 경사가 진 쇠 톱니 장치가 반죽을 넣는 실린더 위에 있어서 거기에 아주 긴 나무 자루를 끼운 모양새였다. 미리 사람 수에 맞추어 그릇을 준비하고 소박하지만 간단한 고명을 마련한 뒤, 반죽을 둥글고 길게 잘라내어 놓은 뒤 가마솥의 물이 설설 끓으면 부엌에 둘러선 여인네들이 보는 가운데 힘이 센 장정이 달라붙어 자랑스럽게 힘을 쓰곤 하였다.

이걸 말아내는 육수 또한 강원도의 명물이니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여기서육수란 고기가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다. 요즈음은 고기로 낸 국물 여부와는 상관없이 냉면 국물은 육수, 음식 고유의 즙은 육즙, 이렇게 표현하는 관행이 굳어졌기에 사용하는 것이다. 강원도의 산간에서 땅에다 묻어놓은 동치미 특히 갓도 함께 넣고 담근 동치미 국물을 겨울밤에 퍼다가 국수를 말아먹으면 얼음이 자박 자박한 게 이가 시릴 정도다. 하지만 그 감칠맛은 어디에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묘한 맛이 난다. 더구나 국수를 눌러 삶으려면 부뚜막 가마솥에 국수틀을 걸고 물을 끓여야 하기에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어야 한다. 그러면 추운 겨울에도 방문 창문을 다 열어젖혀야 할 만큼 방이 더웠고 방바닥은 뜨거웠다.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방에서 얼음이 낀 동치미에 말아먹는 겨울철의 메밀국수가 막국수와 냉면의 원형이라 하겠다.

세계에서 메밀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 한국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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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냉면이 대도시에 보급이 되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 등장한 게 감칠맛 조미료의 등장이다. 당시에는 아지노모도라는 브랜드로 해방 후엔 미원이라는 브랜드로 알려진 글루탐산나트륨 조미료는 전 세계인의 식탁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집에서 요리를 할 때 감칠맛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가정이 많지만 외식을 하지 않거나 가공식품을 먹지 않고 생활하는 현대인은 거의 없으므로 여전히 많은 섭취를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조미료가 워낙 비싼 탓도 있고 해서인지 이걸로 냉면 육수 맛을 낸다는 걸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냉장설비의 보급과 함께 냉면은 계절에 상관없이 여름에도 즐기는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툭하면 식중독의 원인이 되었고 대장 균이 득실거리는 비위생 식품의 대명사가 된 적도 있었던 게 바로 이 냉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조미료 대신 고기로 냉면육수를 내는 식당이 늘어난 것은 진화이고 위생적으로 환경이 바뀐 것은 발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와 발전에 못 따라간 게 기본 원료인 메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어서 아쉽다.

러시아에서는 그레치카라고 해서 메밀 죽을 많이 먹는다. 중국도 시베이(西北) 지방에서는 메밀로 된 음식을 먹는다. 프랑스에는 메밀로 만든 크레프인 갈레뜨가 있고, 이태리에도 피쪼케리라는 메밀 파스타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메밀을 제일 좋아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 아닐까 한다. 일본은 연간 생산량이 3만톤 정도인데 이게 국내 소비량의 20퍼센트 정도이다. 역산해 보면 소비량이 15만 톤 정도인데 수입 물량의 대부분이 중국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연간 생산량이 3천 톤 정도라고 하는데 일인당 60그램으로 일년에 한 그릇도 안 되는 양이다.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긴데 인구비례로 계산해보면 우리나라가 일 년에 6만 톤 정도는 수입을 해야 일 인당 일본만큼 메밀을 먹는다는 주먹구구가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당에서 내는 국수의 메밀 함량이 떨어져서 수입량은 훨씬 못 미칠 것 같다. 일본에서는 아예 규정으로 메밀 함량이 30퍼센트 이상이라야 ‘소바’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이건 수퍼에서 파는 건면의 경우이고 보통 식당에서 파는 소바는 메밀 함량이 최소 50퍼센트 이상이다.

맺으며

맛있는 소바 문화를 지켜온 일본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메밀이 수입품이라 맛이 없는 게 아니다. 좋은 품질의 메밀을 구입해서 보관과 유통을 잘하고 도정을 신선하게 하면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입맛이다. 소비자가 좋은 걸 알고 찾으면 장사하여 돈을 버는 사람은 언제나 요구에 부응한다. 우리나라도 냉면이든 막국수이든 맛있는 메밀국수가 부흥하여 한국이 세계에 자부하는 음식문화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 영화
<<메밀꽃 필 무렵>>
2012년 작

한국단편문학을 대표하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극화한 작품으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선보인 한국단편 문학선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장돌뱅이로 평생을 살아온 허생원은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인 조선달을 따라간 주막에서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난다. 메밀꽃이 핀 달밤에 그들과 동행하던 허생원은 동이와 자신의 기막힌 인연을 감지한다. 책 속에서만 상상하던 장면, 특히 허생원이 봉평장에 들르기 위해 밝은 달빛 아래에서 메밀꽃밭을 거니는 장면은, 셀 애니메이션만의 따스한 정서와 함께 한국적 정취를 선사한다.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 이주익

이주익

영화제작자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영화 <워리어스 웨이>, <만추>, <묵공> 을 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음식 전문 서전 수천 권을 보유중이다. 음식 관련 영화와 TV 드라마 제작을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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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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