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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불을 잡는다는 뜻의 멸화군은 조선시대의 소방관이었다.
이들은 화재진압과 화재예방활동 등 불에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했다.
그러나 멸화군은 몇 차례 축소와 폐지가 반복되다, 인조 때 명칭조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불과 용감하게 맞서싸웠던 멸화군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소방관 “멸화군”
깊은 밤 종묘 안에서 사내들이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데..
“챙길 만큼 챙겼으면 이제 그만 나가시오. 그러다 걸리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요.”
“걱정 마시오. 뒷탈이 생기지 않도록 잘 처리할테니”
이들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제사 물품들을 봇짐에 집어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종묘 안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곧,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아침 6시 출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 종로에서 보초를 서던 군졸은 멀리서 불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 불이 났구만 저긴 종묘쪽인데”
놀란 군졸은 종을 치기 시작했다.
궁궐 내에서 숙직을 하기 시작했던 50여명의 군졸들은 종소리를 듣자 서둘러 집합장소로 모여들었다.
“불이다~! 위치는 종묘 장비를 챙겨라”
“네, 알겠습니다”
군졸들은 신속하게 도끼와 쇠갈고리, 불을 진화할 때 사용하는 멸화자를 챙겨서 종묘로 달려갔다.
이들이 바로 조선시대 소방관 멸화군이었다.
조선시대 화적들의 잦은 출몰
종묘에 도착한 멸화군은 일사불란하게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노비들이 물을 길어오면 멸화자에 적셔 불길을 진압한다. 너희들은 불이 번지지 않도록 도끼로 주변 건물을 부순다. 나머지는 건물이 부서지지 않도록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제거하도록 하라”
멸화군이 신속하게 진화를 한 덕분에 곧 불길이 잡혔다.
“요 근래 한양에서 화적들이 출몰하여 크고 작은 화재를 일으켰다. 방화일 가능성이 크니 현장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라”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화적들의 출몰이 잦았는데…
이들은 불을 질러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이 틈을 타 재물을 훔쳐 갔다.
방화범을 엄벌에 처하라!
이에 따라 조정은 화적들의 방화를 엄격히 처벌했는데 방화범은 극형인 능지처사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종묘 안에 화적들이 생활한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종묘를 관리한 아전들의 거처에서 제기가 발견되었습니다”.
“화적들과 아전이 내통해서 제사 물품을 훔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전을 당장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하라~! 또한 도성 주변을 샅샅이 뒤져 화적들을 체포하라”
체포된 아전은 곧 죄를 자백했고 화적들도 체포되어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조선시대 소방서 금화도감
저녁 6시 퇴근,
조선시대 한양에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었고 지붕이 거의 붙어
있다시피 가까이 지어 있어 자칫하면 대형화재로 이어진곤 했다.
이에 따라 세종 8년 조선 최초의 소방서인 금화도감을 설치했고 차후 이것이 개칭되어 멸화군이 되었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과 싸웠소, 덕분에 화재로 인한 피해가 많이 줄어 들었지,
헌데 조정관리들은 이제 비용이 많이 드는 멸화군을 없애자고 하더군”
조선시대 소방관 멸화군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불을 잡는 군인이라는 뜻의 멸화군 조선시대의 소방관이었다. 이들은 화재진압과 화재 예방 활동 등 불에 관련한 모든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멸화군은 몇 차례 축소와 폐지가 반복되다 인조 때에는 그 명칭조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불과 용감하게 맞서왔던 멸화군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낸 자는 곤장 40대, 이웃집까지 불태운 자는 곤장 50대, 종묘나 궁궐까지 불태운 자는 사형에 처한다. 또한 궁궐 창고를 지키거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났을 때 혼자 도망가면 곤장 100대를 친다.’ -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1417, 영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