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안녕, 호두

생각하는 동화 : 안녕, 호두 생각하는 동화 : 안녕, 호두
하늘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산길을 걸어 올라가자니 여기저기 부딪치고 긁혀 얼굴이니 팔이니 성한 곳이 없었다. 휴대전화 불빛이 닿지 않은 곳은 뿌연 게 돌인지 아닌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우진이는 아직 2학년밖에 안 됐는데 나보다 산을 더 잘 올라가는 것 같았다. 몸이 가벼우니까 그런가 보다.
“정말 이쪽이 맞아?”
숨을 헉헉거리면서 아까 물었던 말을 또 물어봤다.
“응, 아까 어떤 애가 꼬리가 호두처럼 생긴 고양이가 이쪽으로 올라가는 걸 분명히 봤다고 했어.”
호두는 보통 노란색 고양이와는 다르게 꼬리가 세모 모양으로 꺾여 있다. 그래서 그 애가 다른 고양이와 호두를 착각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두를 처음 본 건 작년 봄이었다.

그때 내 동생 우진이는 1학년이어서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때는 내가 데리고 가야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개천을 따라 난 산책길을 따라가다가 우리는 말다툼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진이가 감히 형한테 대든 것이다.
“그렇게 말 안 들을 거면 너 혼자 집에 가.”
나는 우진이가 쫓아오지 못하게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뒤에서 형아, 형아,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못 들은 척했다.

흥, 그렇게 대들 거면 집에도 혼자서 가보라지.

하지만 5분도 안 돼서 후회했다. 나 혼자 집에 들어가 봤자 엄마한테 혼날 게 뻔해서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우진이를 찾았지만, 우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우진이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내 속은 점점 더 타 들어 갔다.

그때 수풀 속에서 우진이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수풀 속에 숨겨진 고양이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진이는 고양이 집 앞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연한 갈색 고양이는 날 보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기지개를 쭉 켜고는 집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형아, 호두가 방금 말했다?”
온몸에 땀을 뒤집어쓴 나와는 달리 우진이는 태연하기만 했다.
“가자!”
갑자기 기분이 상해서 우진이 손을 홱 낚아채고서는 집으로 향했다.
“내가 형아가 없어서 무섭다니까 호두가 괜찮다고 했어. 그리고 자기 쓰다듬어도 된다고 했어.”

“호두? 저 고양이 이름이 호두야?”

“응, 자기 이름이 호두라고 했어.”

“고양이가 사람 말을 했단 말이야?”

“진짜야, 내가 들었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고양이가 사람 말을 했다고? 이래서 어린이와는 말이 안 통하는 거다.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다니까. 이제 나도 열두 살, 십 대니까 내가 참아야지.
“형아, 우리 집에 호두 데려가면 안 돼?”

“너, 엄마 몰라? 엄마 고양이 알레르기 있잖아.”
우리 엄마는 골목 반대편 끝에 고양이가 서 있어도 뒷걸음질 쳐서 도망가는 사람이다.
“호두랑 얘기하는 거 재밌는데…… 형아, 우리 매일매일 호두 보러 가자. 응?”
그때부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 호두를 보고 갔다. 어떤 날은 용돈을 털어서 고양이가 좋아하는 연어 캔을 사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고양이 비스킷을 사가기도 했다.

호두는 늙은 고양이였다. 호두를 돌봐주는 캣맘 아줌마가 그러는데 호두는 사람 나이로 치면 할아버지 나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 느리고, 게을러 보였다.

우진이는 저 멀리 호두가 보이면 반가워서 뛰어가는데 호두는 느긋하게 한 번 쳐다보고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오는 게 어딘가 싶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호두가 보이지 않았다. 우진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걱정이 됐다. 우리는 아침에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저녁에도 나와서 호두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그저께 어떤 애들이 호두가 차에 치이는 걸 봤다고 했을 때는 정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애들이 말하는 곳에 가보니 아스팔트 바닥에 시커먼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고양이가 죽으면 그런 자국이 남는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아니야, 호두는 안 죽었어!”
우진이는 그 중의 한 명을 밀쳤고, 나는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우진이와 그 애 사이에서 막느라 진땀을 뺐다.
“우진아, 호두는 이제 그만 찾아도 될 것 같아.”

“형도 호두가 죽었다고 믿어?”
우진이는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며칠만 더 호두를 함께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호두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렸다.

오늘도 저녁 먹은 후에 호두를 찾으러 나왔는데, 어떤 꼬마가 호두처럼 꼬리가 세모 모양으로 말린 노란 고양이가 이 산길로 올라가는 걸 봤다고 했다.

우진이는 호두 이름을 부르면서 무작정 산길로 들어갔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와 발 밑으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어디 멀리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은 나뭇잎 냄새와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땀에 젖은 피부에 바람이 스쳤다. 깜깜한 산길에서 튀어나온 거친 나뭇가지가 팔과 얼굴을 할퀴며 지나갔다.
“호두야, 호두야.”
우진이가 애타게 불렀다.
“호두는 개천 옆에서 사는 고양이인데 이런 산속까지 들어올 리가 없잖아. 그 애가 잘못 본 게 틀림없다니까.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우진이 팔을 잡았다.

그때 야옹,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두다!”
나는 그쪽으로 뛰어가려는 우진이를 붙잡았다.
“그렇게 소리 내면 호두가 깜짝 놀라서 도망갈 거야.”
우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최대한 숨을 고르며 소리를 죽였다. 땀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얼굴로 목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코에서는 단내가 났다.

야옹. 우리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며시 발을 옮겼다.

어두운 하늘 한쪽이 발그스름하게 빛났다. 주변보다 높이 솟은 넓은 바위가 보였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절벽을 등지고 서 있고, 열한 명의 고양이가 그 고양이를 바라본 채로 일렬로 서 있었다. 내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들은 분명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었다.

고양이들은 손에 주먹만 한 공을 들고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몸에서 빛이 났다. 절벽을 등지고 있던 고양이가 입을 열자 사람 말이 튀어나왔다.
“시간이 되었다. 모두 지구에서의 경험은 잘 기록해 두었지?”
열한 마리의 고양이들이 동시에 네, 라고 대답했다. 절벽을 등진 고양이가 대장 고양이인 것 같았다.
“이번에 돌아가면 그대들은 그동안 지구에서 겪었던 일을 잘 이야기 해주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지구에서 고생이 많았다. 모선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대장 고양이가 말을 마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공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공에서 하얀 빛이 나와 검은 밤하늘 사이를 뚫고 올라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거대한 우주선이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그저 입을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지잉- 우주선 밑바닥이 열렸다.

대장 고양이가 바닥에 있던 판 위에 올라섰다. 둥근 방석처럼 생긴 판이었는데 밑은 구름 모양처럼 둥글둥글했다. 대장 고양이가 공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들자 이번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나왔다.

조금 후에 대장 고양이 주변에 주홍빛 불꽃 같은 것이 올라왔다. 북극에 나타난다는 오로라 같기도 했는데 마치 대장 고양이를 보호하듯이 아래에서 위로 일렁였다.

대장 고양이가 떠올라 우주선의 열린 문을 향해 천천히 날아 올라갔다. 줄지어 있던 다른 고양이들도 하나씩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내가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모습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가장 마지막에 있던 노란 고양이가 날아오를 차례였다.

그때, 우진이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내가 미쳐 붙잡을 새도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진이 뒤를 따라갔다.
“호두야!”
호두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가지 마, 호두야, 가지 마.”
안녕, 호두
우진이가 호두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서럽게 울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호두는 그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한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진이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흐느꼈다.

호두가 우진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우진이 손을 핥았다. 언제 다쳤는지 우진이 손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호두가 우주선 쪽을 힐끗 돌아봤다. 다른 고양이들은 모두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호두는 우진이 손에 머리와 등을 비볐다. 함께 놀 때 자주 하던 그대로였다.

호두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하암. 고마워. 귀염둥이들아. 덕분에 지구에서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어.”
사람 말을 하는 호두 목소리는 정말 할아버지 목소리였다.
“꼭 가야 해?”

“그래, 지구에서의 내 일은 끝났어. 때론 고달프고, 힘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즐거웠지. 특히 너희와 함께 놀았던 건 꽤 괜찮았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호두가 고개를 까딱했다.
“고향별로 돌아가면 너희 얘기를 꼭 해줄게. 아직도 우리 행성에서는 지구와 지구인을 궁금해하는 아기고양이가 많거든.”
우진이는 호두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호두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가슴도 먹먹해졌다.
“잘 있어. 꼬마 우진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
우진이가 물었다.

호두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씰룩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거든. 보다시피 내 몸은 지구에서 살기에 너무 늙었어. 대신 내가 귀여운 아기고양이들에게 너희 얘기를 꼭 해줄게. 그 애들은 지구에 와서 너희 같은 아이들과 놀고 싶어서 난리일 거야.”
호두가 갸르릉 소리를 내며 웃었다.
“보고 싶을 거야. 호두야.”
우진이는 못내 아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호두는 우리에게 등과 꼬리를 몇 번 쓰다듬을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조심해서 돌아가. 호두야.”

“걱정하지 마. 귀염둥이들.”
호두는 마지막이라는 듯이 우진이와 내 손을 핥았다. 그리고 공을 받쳐 들고 우주선으로 올라갔다.

우진이와 나는 호두가 타고 떠나는 우주선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우리는 까만 밤하늘 사이로 사라진 호두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나에게 와줘서 고마웠어. 안녕, 호두.”
글 / 이유리_동화작가, 1978년생
장편동화 『아구똥이와 뒤죽박죽 박사』, 『핑스』, 동화집 『너와 나의 2미터』(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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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2-1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