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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

옛그림 산책

불우했던 야인의 아픈 기억을 담다

옛그림 산책 :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들판을 거닐던 시절 강세황의 <신수 사군자도 />옛그림 산책 :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들판을 거닐던 시절 강세황의 <신수 사군자도 />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1713년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강현(姜�, 1650~1733)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세황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강현의 나이는 64세였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1603~1680)은 예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한 고위 관료로 강세황은 명문 진주 강씨(姜氏) 집안에 태어나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시기를 거치면서 당색(黨色)이 소북(小北)이었던 강세황 집안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치적으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1728년에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및 남인 과격파가 일으킨 반란인 이인좌(李麟佐, ?~1728)의 난에 형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본래 강세윤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국문(鞫問) 과정에서 관원들이 반란군의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인 정세윤(鄭世胤)을 강세윤으로 혼동해 그는 역모의 일원이 되었다. 강세윤은 후일 신원(伸�)되었지만 영조 연간에 강세황은 노론 일색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을 할 수 없었다. 형이 귀양을 가고 아버지가 조정에서 축출되어 강세황은 벼슬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고 꿈도 없이 불우한 운명을 견뎌야 하는 야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림 1) 강세황, <산수・사군자도(山水・四君子圖) />,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폭 34.2 x 24.0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1) 강세황, <산수·사군자도(山水·四君子圖)>,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폭 34.2 x 24.0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은 32세 때인 1744년에 처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여 이후 30년 가량 처가살이를 하였다. 안산에서 강세황은 늘 가난에 시달렸다. 1756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아내 류씨(柳氏)가 전염병에 걸려 44세의 나이에 사망하자 강세황은 「죽은 아내를 제사 지내며(祭亡室文)」라는 글에서 부인 류씨가 생계를 책임져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던 날들에 대해 토로하였다. 그는 1766년(54세) 자신의 인생을 추억하며 쓴 자전적인 글인 「표옹자지(豹翁自誌)」를 남겼는데 이 글에서 강세황은 자신이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불우한 운명에 처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당쟁으로 인해 강세황은 벼슬길이 막혀 안산에서 시대를 한탄하며 좌절감과 울분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표옹자지」에서 그는 “나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으로 운명과 시대가 어그러져서 늦도록 출세하지 못하고 시골에 물러앉아 시골 늙은이들과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다. 만년에는 더더욱 서울과 소식을 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간혹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들판을 거닐었다”고 안산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가던 자신의 모습을 적고 있다.
(그림 2) 강세황, <산수・사군자도(山水・四君子圖) />,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폭 34.2 x 24.0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 강세황, <산수·사군자도(山水·四君子圖)>,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폭 34.2 x 24.0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이 안산에서 야인으로 불우하게 살았던 세월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그림은 8폭 병풍인 <산수·사군자도>(그림 1, 2)이다. 이 병풍은 각 폭이 가로 24cm, 세로 34.2cm으로 작은 크기의 그림이다. <산수·사군자도>를 보면 처음과 마지막 폭에는 대나무와 난초가 그려져 있다. 나머지 여섯 폭 중 다섯 폭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인물이 그려져 있다. 제2, 3, 4폭에는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 소나무 아래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옆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듣고 있는 노인, 강 위에서 떠 있는 배에서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긴 사람이 그려져 있다. 제5폭에는 나무와 빈 정자 너머로 넓은 강이 펼쳐져 있다. 제6, 7폭에는 강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허리가 굽은 인물과 겨울날 눈 속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언덕길을 내려오는 노인이 그려져 있다. 제7폭에 보이는 잎이 떨어진 나무는 강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삭풍이 부는 겨울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쓸쓸하게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제6폭에 강가에 홀로 서 있는 등이 굽은 노인은 「표옹자지」에서 “간혹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들판을 거닐었던” 자신의 분신(分身)이다(그림 3).
  • (그림 3) <동궐도 />, 국보 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 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 3) 그림 2의 세부
  • (그림 3) <동궐도 />, 국보 249호, 1828~1830년경, 비단에 채색, 각 첩 45.7x36.3cm, 전체 273.0x 584.0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 4) 그림 2의 세부
<산수·사군자도>의 각 폭에는 ‘무일점진(無一點塵)’과 ‘강세황인(姜世晃印)’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장은 ‘한 점의 더러운 티끌도 없는’을 뜻하는 ‘무일점진(無一點塵)’이다. ‘무일점진’은 강세황이 <초당한거도(草堂閑居圖)>(1748년, 개인 소장)에서 사용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맑다’라는 뜻을 지닌 ‘세인개탁아독청(世人皆濁我獨淸)’ 인장과 의미 면에서 상통한다. 이 두 인장의 문구(文句)는 모두 굴원(屈原, 기원전 343년경~277년경)의 「어부사(漁父辭)」에서 유래된 것이다. 굴원은 전국시대의 초(楚)나라에서 활동한 인물로 국정을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그를 싫어하는 인물들의 중상모략으로 조정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유랑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굴원은 후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불우했지만 강직하고 고결한 문인의 상징이 되었다. 굴원과 마찬가지로 강세황은 불우했지만 스스로 맑은 사람으로 남고자 했다. 그런데 1773년 당시 61세였던 강세황에게 인생의 반전이 일어났다. 그는 이 해에 종9품 최말단 벼슬인 영릉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라 71세가 되던 1783년에 현재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인생의 만년에 빛나는 삶을 살았다. 강세황만큼 인생의 부침을 경험한 인물도 드물다. <산수·사군자도>는 이 모든 만년의 영광이 시작되기 전 불우했던 야인 강세황이 겪었던 삶의 아픈 기억이 담긴 그림이다.
장진성
글 /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1966년생

공저서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저서
『단원 김홍도 :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

역서
『화가의 일상 :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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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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