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레버넌트] 처절함 - 소설은 시간, 영화는 감정

원작 대 영화 - 레버넌트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원작 대 영화 - 레버넌트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레버넌트』는 처절하다. 영화도, 소설도. 한 인간의 생존 몸부림이 그렇고, 복수에 대한 집념이 그렇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란 영화의 부제가 과장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아니라,
‘지옥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수없이
이겨내고 살아나 복수하는 자’란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글래스가 살기 위해, 살아서 복수하기 위해 겪은 일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회색 곰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숨만 붙어있는 주인공 휴 글래스가 혼자서 아무런 도구도 없이 혹독한 겨울, 인디언의 습격이 늘 도사리고 있는 1823년북미의 험준한 산악과 강을 이겨낸다. 인디언의 공격을 피하려 기어서 강변을 지나고, 부상의 몸으로 얼음 강에 뛰어들고, 추위를 이기려 죽은 말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뒤 그 속에 들어가 밤을 새고, 허기를 채우려 죽은 짐승의 뼈에서 파낸 말라빠진 골수와 산 물고기를 먹는다.

휴 글래스는 실존 인물이다. 외교관인 미국의 마이클 푼케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19세기 초 미국의 한 사냥꾼 이야기를 『레버넌트』에 담았다. 그렇다면 『레버넌트』는 실화일까. 푼케는 이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에필로그에 “모피교역시대의 이야기는 역사와 전설의 탁한 혼합물이다. 휴 글래스의 역사에도 약간의 전설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몇몇 등장인물과 상황은 상상의 산물이고, 사학자들 사이에 엇갈리는 의견에서 한쪽만을 선택한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글래스가 곰의 공격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도, 그를 돌보기 위해 남았던 동료들이 그를 버리고 떠난 것도,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복수를 위해 불굴의 의지로 길고 혹독한 추격을 벌인 것도 ‘사실’이라고 푼케는 말한다. 그래서 『레버넌트』는 실화이지만, 소설(팩션)이다.

시간 순서대로, 인공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태양과 불빛만으로 영화를 찍는 것으로 유명한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이 이 작품을 토대로 영화 『레버넌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지도 전부 담지도 않았다. 주요 인물과 배경, 주제와 소재, 사건의 모티프는 가져왔지만 상황과 시간, 과정은 푼케가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아니 상당 부분 영화적 상상을 섞었다. 그래서 『레버넌트』는 소설이지만, 영화이다.

『레버넌트』는 복수극이다.

실화도, 소설도, 영화도 그렇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휴 글래스의 목표는 오로지 복수다. 그가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것도 배신자인 동료 피츠제럴드를 찾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생존은 복수를 위한 조건일 뿐이다. 그는 “한 번 죽어봤으니까,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글래스의 복수 감정에 대한 당위성과 공감과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크게 하기 위해 이냐리투 감독은 소설의 시간과 거리를 줄이는 대신 상황과 사건을 더 처절하게 만드는 선택을 했다.

소설 『레버넌트』에는 인디언과 살았다는 이유로 짐승이나 잡종 취급을 하는 백인은 없다. 백인들이 우리의 땅과 동물을 훔쳐갔다고 비난하는 인디언도 없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처형해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죄명을 ‘짐승’이라고 써놓는 잔혹한 장면도 없다. 인디언과 생활하지도,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죽은 인디언 아내의 꿈과 환상도 없다. 백인에게 납치된 인디언 아리카라족 추장의 딸을 구해주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도 없다. 통쾌한 복수도 없다. 그보다는 상상이나 가정, 비판적 시각을 배제하고 글래스의 1백여 일 동안의 생존 기록에만 충실했다.

영화도 소설처럼 단순히 돈에 눈이 어두운 피츠제럴드와 나이 어린 겁쟁이 브리저가 부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자신을 버려두고 떠났다면 그의 끈질긴 복수의 의지와 그것을 위한 사투 역시 감정이입이 약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품인 총과 칼까지 가지고 간 것이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1백여 일 동안 인디언에 쫓기거나 붙잡혀 죽을 고비를 반복하면서 겨울 북미의 험한 산을 수 천 마일이나 넘나드는 불굴의 집념이 과장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소설의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감정을 극대화하는 설정을 했다. 글래스가 한때 인디언들과 생활했고, 그때 인디언 여자와 결혼했지만 아내는 백인에게 살해당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있는데 그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 변을 당했고, 피츠제럴드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 때 그 아들까지 죽였다. 이로써 글래스의 복수심은 더욱 강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의 초인적인 생존 의지에 관객들은 응원을 보낼 명분을 얻었으며,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인종차별, 신의 뜻을 빙자해 저지르는 악행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을 피로 물들인 종교적 위선의 역사도 드러낼 수 있게 됐다.

영화 『레버넌트』는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에 대한 설득력과 공감을 얻기 위해 강한 동기와 응축된 과정, 카타르시스를 주는 결말로 나아갔다. 앞에 말한 아들의 존재와 죽음, 죽음의 복수, 인디언 아내에 대한 환영과 종교적 악행과 구원에 대한 냉철한 시선 등 극적인 구성과 다양한 코드가 그 재료들이다. 진실에 충실하려 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더 자유로웠으며, 그 자유가 왜 필요한지 아는 감독의 솜씨로 영화는 소설과 다른 서사구조와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소설 『레버넌트』

영화 『레버넌트』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에 대한 설득력과 공감을 얻기 위해
한 동기와 응축된 과정,
카타르시스를 주는 결말로 나아갔다.

앞에 말한 아들의 존재와 죽음, 죽음의 복수, 인디언 아내에 대한 환영과 종교적 악행과 구원에 대한 냉철한 시선 등 극적인 구성과 다양한 코드가 그 재료들이다. 진실에 충실하려 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더 자유로웠으며, 그 자유가 왜 필요한지 아는 감독의 솜씨로 영화는 소설과 다른 서사구조와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영화가 더 대중적이고 감독과 배우가 유명하다고, 소설보다 훨씬 극적이고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영화와 달리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예상을 빗나갔다고 실망할 이유도 없다. 그것이 작가가 지어낸 엉뚱한 상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실제로 군법재판이 열린 것과 글래스가 피츠제럴드 어깨를 쏜 것은 작가가 지어냈다고 고백했으니, 소설이 지키고자 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또한 작가와 감독의 선택 문제이다.

영화도, 소설도 복수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선택은 달랐다. 푼케는 용서를, 이냐리투는 복수를 선택했다. 영화에서 글래스에게 복수로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없다고 외치는 인간이 피츠제럴드란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래서 글래스도 성경의 한 구절(로마서 12장 19절)인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복수는 내 손에 달린 게 아니야. 신의 일이지”라고. 그래놓고는 단지 직접 죽이지 않을 뿐, 글래스는 직접 죽음의 복수를 한다. 영화는 그 이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소설의 생각은 다르다. 총으로 피츠제럴드에게 부상을 입힌 글래스가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사실’에서도 글래스는 복수로 자신의 인생도 끝내지 않았다. 그래서 푼케는 프랑스 친구 카이오와를 다시 등장시켜 감옥에 있는 글래스를 꺼내주게 만든 다음, “볼 마음이 없는 자보다 더 지독한 맹인은 없다”는 말로 복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글래스가 그날 자신의 징조로 본 밤하늘의 별자리 역시 섬뜩한 칼을 쳐든 사냥꾼인 오리온이 아니라, 십자가 모양으로 변하고 있는 북십자성이었다.

복수는 상처를 직접적으로 되갚는 행위이다.

심리적 위안은 될지 몰라도 어떤 보상이나 이익도 없다. 오히려 엄청난 자기 파괴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복수는 억울하게 당한 피해가 클수록, 그로 인해 삶이 무너져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마이클 맥컬러프 교수가 『복수의 심리학』에서 말했듯이 사회가 그것을 바로잡을 어떤 방법도 제공하지 않을 때, 더욱 강한 매력과 정당성을 얻는다. 때문에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일수록 사람들은 복수극에서 대리 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영화 『레버넌트』도 그런 심리를 읽어낸 작품이다.

영화 『레버넌트』는 누구보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002년 소설이 나오자마자 할리우드가 영화로 만들 궁리를 했지만, 감당할 배우가 없어 지금껏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아닐까. 글래스는 단순한 연기나 상에 대한 욕심만으로 영화로 불러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인물이다. 그래서 작품의 평가가 어떻던, 소설과 영화의 글래스가 얼마나 다르던, 배우에게 어떤 상이 주어지던, 우리의 상상의 한계까지 뛰어넘는 열정으로 혼신을 다해 혹독한 자연에 맞선 디카프리오야말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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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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