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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

꼬꾜고오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청신한 신호음이 아침 공기를 가른다.
째재잭짹~ 째재잭짹~
기다렸다는 듯 새들의 떼창이 이어진다.
꼬꾜고오오—
째재잭짹~ 째재잭짹~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1

뒷마당 수탉과 나무 위 새들이 다투듯 만들어내는 생체형 기상 알람이다. 잠을 깨우는 건 소리만이 아니다. 어느 집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젓국 냄새도 은근슬쩍 가세한다. 문틈, 창문 틈을 비집고 스며든 냄새가 침대 머리맡까지 밀려든다. 이 일련의 단잠 훼방꾼들의 협업이 아련한 향수를 일깨우고 있는 이곳은 시골 외할머니댁도 큰집 농장도 아니다. 비행기로 다섯 시간 날아온 이국땅의 호텔룸이다. 호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도록 촌내가 물씬 나긴 하지만 여행꾼들 사이에는 입 소문 나 있는, 그럼에도 아직은 손이 덜 탄 베트남 남쪽 ‘무이네’라는 휴양지의 가정식 호텔이다.

무이네. 무릉도원의 이웃 마을쯤 돼 보이는 소박하고 정겨운 이름의 이 휴양지 겸 어촌 마을은 호찌민에서 버스로 다섯 시간 달려온 곳에 있다. 긴 이동거리에 처음엔 겁부터 먹었지만, 슬리핑 버스에 몸을 뉘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풍경과 책과 폰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닿아 있는, 이동 자체가 또 다른 여행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여정이었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 온 듯한 편안함에 끌려 원래 사흘이던 예정일을 훌쩍 넘겨가며 머물고 있다. 빡빡하게 계획을 세우고 '빡세게' 다니는 게 원래 내 여행 스타일인데 이상하게 이곳에 오고 난 뒤로 할머니 잔소리 속 ‘게을러빠진 화상’이 돼버린 것이다. 한 곳에 짱 박혀 세월아 네월아 하는 여행의 맛을 이전에는 몰랐다. 유적지와 미술관, 박물관 많은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를 부지런히 발품 팔고 다니던 때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이곳에서는 친정에 몸 풀러 온 새댁처럼 속 편하게 뭉그적거리고 있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베트남 전통가옥에 프랑스풍이 가미된 콜로니얼 스타일의 천장 높은 붉은색 목조 건물이다. 우리나라 적산가옥처럼 식민지 나라의 독특한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이 층짜리 건물이 열대 식물로 가꿔진 마당을 품고 있는 가정집 분위기의 단아한 호텔이다. 방 앞 복도에 있는 해먹에 들어앉아 열대 식물로 그득한 마당이나 건물 처마에 걸린 홍등과 처마 끝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에 놀러 온 이브라도 된 기분이다.

꼽아 보니 세 번째 베트남 여행이다. 7년 전 첫 여행에서는 하노이부터 시작해 북부 지방을 돌았고 두 번째 여행은 호이안과 다낭, 후에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지역을 둘러봤다. 이번에는 호찌민으로 들어와 남부의 주요 여행지를 돌기로 했으니 남북으로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길쭉한 지형의 나라를 세 번에 걸쳐, 겉핥기식이긴 해도 그럭저럭 거의 다 둘러보게 된 셈이다.

이전에는 베트남 하면 베트남전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는 우울한 역사부터 떠올랐지만 이제는 박항서의 매직 축구와 한국 기업들이 선호하는 투자 지역, 한국인들의 인기 여행지라는 친근하고 밝은 이미지의 현재를 떠올리게 된다. 반가운 일이지만 여행자로서는 현지의 이런 변화와 활기가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닌지라 호찌민에서 서둘러 이곳으로 와버렸다. 여행자의 입맛이란 맛집을 찾는 미식가처럼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현지인들 입맛을 퇴짜 놓기 일쑤다. 그래도 부디 바라건대, 이 나라만큼은 속도전 내세우는 개도국 아닌 전통과 자연을 오롯이 보존하며 앞날을 열어가는, 세세토록 여행자를 유혹하는 청정한 나라가 되었으면….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2

마당에서는 오늘따라 일찍부터 사람들 동선이 느껴진다. 나무창을 살짝 밀며 내다보니 웃통 벗은 지배인 남자가 야자수에 올라가 코코넛 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자아이들은 작업에 필요한 연장과 바구니를 챙겨오느라 분주하다. 우리네 시골 마당의 감나무처럼 이곳도 집마다 야자수 몇 그루는 살림 밑천처럼 마당을 지키고 있다. 이층인 내 방 바로 앞에도 야자수가 한 그루 서 있다. 복도 난간 밖으로 팔을 한껏 내뻗으면 코코넛 열매가 손에 닿을 듯하여 ‘서리’의 유혹이 한 번씩 발동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브의 선악과도 이 ‘서리 본능’ 때문이 아니었을까?

바닷바람이 집중적으로 불어오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야자수 이파리들이 바람에 휩쓸리며 내는 소리가 얼마나 거칠고 드센지 처음에는 태풍이라도 몰려오는 줄 알았다. 코앞에서 본 야자수 이파리는 어른 키만 한 길이로 가운데 잎맥은 거대한 포유류의 척추를 연상시키듯 크고 억세며, 양옆으로 퍼져나간 가느다란 잎들은 갈비뼈처럼 촘촘하고 단단하게 나 있다. 바람이 불면 이 엄청난 크기의 야자수 잎들이 저마다 휘청이며 메마르고 거친 소리를 거침없이 토해낸다. 사흘 만에야 바닷바람도 일정한 시간에 집중적으로 불어온다는 것, 그 규칙성이 이곳 해안 지형의 특성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자수의 위협적인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사실이다.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3

이곳 지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라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바다 바로 옆에 사막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모래 사구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바다와 사막의 동거라는, 지킬과 하이드의 조합 같은 그 이율배반적 모습에 누구든 경탄을 금치 못한다. 사구도 어떤 곳은 창백하도록 하얀 ‘화이트 샌듄’이, 다른 곳은 분가루처럼 곱고 붉은 모래로 ‘레드 샌듄’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4

조물주의 이러한 컬러 취향은 ‘리틀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수사가 따라붙는 ‘요정의 샘’에서 절정을 이룬다. 깜찍하고 귀여운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모래 위로 석회수가 흘러내려 얕은 시내를 이룬 일종의 밀림형 협곡이다. 이 얕은 시내를 따라 걸으면 협곡 양쪽으로 하얀 석회수와 붉은 황토가 결합하여 빚어낸 조각상 같은 암석들이 요정의 선물처럼 펼쳐진다. 여행객들은 성지 순례라도 하듯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길게 펼쳐진 계곡을 걸으며 발끝에서부터 자연의 속살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천혜의 자연이 빚어낸 명소를 찾는 것도 무이네 여행의 즐거움이지만 정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곳 어촌 마을 풍경이다.

다수 여행자들의 동선이 이루는 경계선에서 안쪽으로 한 발만 더 들여놓으면 마을 주민들 생활상을 보다 날것으로 접할 수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발품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하루아침에 유명해져 버린 어떤 곳은 갑자기 몰려든 관광객들로 메뚜기 떼 휩쓸고 간 들판처럼 돼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그런 최악의 상황을 경계하며 자신만의 향유가 지속되길 바라는 공간에의 독점욕이 있다. 그래서 진짜 마음에 드는 곳은 남에게 잘 알리지 않으려 한다.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 기후처럼 이곳은 하루의 리듬도 이른 아침과 해질녘으로 나뉜다. 선선한 아침에 산책 겸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햇볕 뜨거운 낮에는 숙소의 해먹에서 빈둥거리다 해질녘 다시 밖으로 나선다. 여행지에서 하루 10킬로미터 정도는 기본으로 걷는 게 몸에 밴지라 웬만한 거리는 발품으로 해결한다. 느릿느릿 해변이나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며 산책도 하고 시장 구경도 하다 배고프면 식당을 찾아 끼니 해결까지 한다. 소의 걸음에 맞춘 듯한 일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곳의 진짜 매력 같다.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5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6

오늘 오후엔 좀 더 일찍 호텔방을 나섰다. 해변 모래사장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니 ‘피싱 빌리지’의 부두까지 왔다.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이면 출항하거나 들어오는 배들로 붐비는 곳이다. 화려한 색상의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 또한 장관이어서 여행객들의 인증샷 세례가 쏟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큰 배들은 물이 깊은 바다에 떠있고 얕은 해안에는 ‘까이퉁’이라고 하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광주리 모양의 작은 배들이 떠다닌다. 이 배를 만들 때 소똥을 칠하는 전통적 방식 때문인지 마을을 다니다 보면 소똥 모으는 아낙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한다. 어촌이긴 해도 우리 시골 농가처럼 소나 오리, 닭을 기르는 집들이 많아 해안가에서도 가축들 무리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른 아침 부두에는 바다에 나가 밤새 작업한 배들이 쏟아놓는 수확물로 어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저녁에는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 파는 노점도 열린다. 여행객들이 찾기 이전에는 대대손손 이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음을 짐작게 하는 풍경이다. 이곳 해역에는 가리비나 랍스터, 새우 같은 해산물도 많이 잡히지만 가장 많이 잡히는 어종은 멸치 종류의 생선이다. 생김새는 우리나라의 멸치와 까나리 중간쯤 돼 보인다.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이를 가공하는 작업장이 군데군데 있다. 생선을 삶아서 말리는 마른 멸치 작업장도 있고 소금에 절여 액젓을 만드는 작업장도 있다. 둘 다 저장성 식재료이면서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베트남 무이네, 그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7

‘느억맘’이라는 이름의 이 액젓은 베트남 음식에 가장 많이 쓰이는 천연 조미료다. 음식 맛의 기본을 이루기도 하고 찍어 먹을 때 쓰는 소스가 되기도 한다. 무이네는 베트남에서 이 느억맘의 대표적 산지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넓은 마당을 가진 작업장도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마당에는 이것을 발효시키는 커다란 옹기들이 우리나라 종갓집 장독대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장맛 우려내듯 옹기에서 2년 정도 숙성시켜야 제대로 된 느억맘 맛이 난다고 한다. 혀끝에 오래 남는 감칠맛도 2년 동안 잘 곰삭아든 시간의 맛이다.

매일 아침 내가 호텔방에서 기상 알람처럼 맡아온, 쾨쾨하면서도 구수한 액젓 냄새의 실체도 바로 이것이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청국장 냄새를 맡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국 땅의 어떤 것이든 낯가림 한번 하고 나면 우리의 그 무엇과 닮은 걸 꼭 떠올리게 되는 건 의식주에 얽힌 오랜 인류 문화가 결국은 지구라는 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왔기 때문이 아닐까.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이런 깨달음도 우연히 건진 풍경 사진만큼이나 여행지의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 골목 저 골목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덧 해는 지고 지친 다리와 뱃속의 아우성이 귀가 시간을 일깨운다. 돌아가는 길에 있는 과일 노점에서 바나나와 애플망고와 망고스틴을 잔뜩 사든다. 귀한 열대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이곳 체류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손으로 전해오는 묵직한 봉지 속 과일이 내가 거둔 수확물이라도 되듯 뿌듯해 온다. 숙소를 향해 다시 느릿느릿 걷노라니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생각 하나. 아무래도 이 무이네 여행은 아련하면서도 풍요로운 시간 속에 들어와 있는 환상의 시간 여행이라는 것….

표명희

소설가

소설집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이웃의 안녕』 『하우스메이트』 『3번 출구』
장편소설 『어느 날 난민』 『황금광시대』 『오프로드 다이어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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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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