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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문학 기행

침묵하지 않았던 여성, 나혜석

 다큐 문학 기행 : 침묵하지 않았던 여성 나혜석 다큐 문학 기행 : 침묵하지 않았던 여성 나혜석
1948년 12월 10일 밤 8시 30분, 신원 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사망했다.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이었다. 192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나혜석의 개인전 행사에는 5천여 명이 몰렸고, 다수의 작품이 고가에 팔렸다. 그랬던 그녀에게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48년 12월 10일 밤 8시 30분, 신원 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사망했다.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이었다. 192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나혜석의 개인전 행사에는 5천여 명이 몰렸고, 다수의 작품이 고가에 팔렸다. 그랬던 그녀에게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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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나혜석, 여성의 삶을 말하다

다큐 문학 기행 :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1896년 수원의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한국 여성 최초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여류화가가 되었다. 졸업 후 귀국해서는 함흥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는데, 1919년 3.1운동 시위 관련자로 검거되어 5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의 독립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 지식인이 봉건적인 가부장제와 인습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잡지 <여자계>의 발행을 주도하고 여성 인권에 관한 논설은 물론, 조혼과 가부장제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도 꾸준히 발표했다.
1918년 3월 나혜석이 발표한 자전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주인공 경희가 첫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와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 데서 시작한다.

“계집애라는 것이 시집가고,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 공경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계집도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좋은 집에 시집가면 좋은 옷에 생전 배불리 먹다 죽지 않겠니?”
“먹고만 살다 죽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요.”


소설 속 아버지와 딸의 대화처럼 실제로 나혜석의 아버지는 그녀가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결혼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자 학비 지원을 끊었다. 소설은 경희의 고뇌에서 끝났지만 나혜석은 소설 속 경희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 또한 남달랐다.

현실의 ‘경희’ 나혜석의 결혼과 결별

1920년,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했던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
1920년,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했던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
1920년 4월 10일, <동아일보> 3면 광고란에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청첩장이 실렸다.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결혼 청첩장이었다. 하지만 이 결혼의 뒤에는 조건이 있었다.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했던 김우영에게 나혜석이 제시한 결혼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 조건>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게 해주시오.
그리고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시오.
첫사랑 최승구를 폐병으로 떠나 보낸 나혜석의 파격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김우영. 두 사람의 행보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1927년 김우영과 나혜석은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3년간 체류하는 동안 나혜석은 그림 공부를 하는 한편, 유럽 여성들의 삶과 인권 운동에서 영감을 얻으며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파격적인 결혼 생활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실이 되었다. 공격의 선두에 있었던 남성들은 자식을 두고 집을 비우는 나혜석을 비난했고,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아끼고 감싸는 김우영을 남자답지 못한 졸장부로 여겼다.

그리고 끝내 유럽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김우영이 베를린에 있던 시기에 파리에서 만난 남편의 친구이자 천도교 지도자였던 최린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두 사람의 깊은 교제는 조선까지 널리 소문이 퍼졌고,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들의 이혼 사유는 나혜석의 불륜이었으므로, 그녀에게 쏟아진 사회적 비난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침묵하는 대신 펜을 들었다.

최초의 이혼 여성, 나혜석의 고백

다큐 문학 기행 : 이혼 후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온갖 냉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온갖 냉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이혼 고백장> 중에서
나혜석은 대중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장>과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며 자신이 경험한 결혼과 가부장제의 모순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당찬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혼하면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난데다 최린마저 매정하게 돌아섰던 것이다. 이에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지만, 최린의 압력에 결국 적은 돈을 받고 소송을 취하해야 했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지금은 계급 전쟁 시대지만 미구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
-1933년 2월 28일자 조선일보 <모델- 여인일기>


모든 칼자루를 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나혜석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는 글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의 싸움은 쉽지 않았고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혼 이후 예술가로 평가받기보다 스캔들의 주인공으로만 다뤄졌고, 이혼 고백장을 발표한 이후에는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했다.

이혼 이후에 수기를 잡지에 연재할 생각으로 계속 글을 썼지만, 발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녀는 세상에서 잊혀져 갔고, 사회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길거리를 헤매다가 끝내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사망 당시 60대 중반으로 추정되었던 그녀의 실제 나이는 52세. 굶주림과 병마로 10살 이상 늙어 보였던 초라하고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다큐 문학 기행 : 침묵하지 않았던 여성 나혜석



나혜석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은 인형이 아닌,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살고자 한 꿈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대해 오늘의 시선은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이혼 고백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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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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